그렇게 커다란 못을 다 메우려면
얼마나 많은 흙이 젖어야 했을까
시절을 닮아 깡마른 팔뚝들이
참방참방, 굽은 물길을 내면
못물 위로 그려지는 눈 코 입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을 닦아내는
아이들의 순한 표정을 닮았을 테지
그러다 그 애들 중 몇몇은
깊은 수심과 손잡은 채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던 거지
젖은 빨래를 방망이질하던
아낙들 중 몇몇은
그 물그림자에서 언뜻
저승의 얼굴을 마주했을 테지
누군가는 그곳에서 살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죽었어
수문이 열리면 외롭던 못물이
우르르 마른논으로 흘러갔을 거야
못자리를 부지런히 돌아
갈라진 땅 사이사이를 적시고
초록은 더욱 초록이 되고
피부 검게 그을린 논 주인은
한참을 서서 못자리에
못물 들이치는 소릴 들었을 테지
그러다 문득 그 소리,
올봄 못에 잠겨 죽은 아들의
가장 환한 웃음소리를 닮아서
한여름에도 가슴이 서늘했을까
누군가 살던 물
누군가 죽었던 물이
어떤 것이 싹튼 흙
어떤 것이 묻혔던 흙과
다정하고 서럽게 뒤섞이는 거지
죽고 사는 일이 한데 뒤섞이면
신기하게도 삶이 되더란 말이지
노을 진 초저녁 잠잠한 못 주위를
꾹꾹 눌러 걷다 돌아가는 길에는
희한하게도 시나브로 살고 싶어지던 밤
물보다도 더 많은 흙이 못을 모두 메우고
우리는 이제 수심(水深)이 두렵지 않은
아파트 몇십 미터 고도에 살지만,
가끔 사는 게 왜 이럴까 싶을 때
고개 떨구고 아스팔트 바닥을 한참 보고 있으면
거기 문득, 찰랑이는 못물 소리
어떤 것이 살던 물
어떤 것이 죽었던 물
한참 걷다 보면 희한하게도
살고 싶어지던 물
우리 동네에는
아주 커다란 못이 있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