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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Sep 06. 2016

그 여자네 사무실

가을입니다.

 나는 늦깎이 대학생이고, 여자 친구는 직장인이었던 때. 공교롭게도 여자 친구의 직장은 우리의 대학이었다. 신생 학과에서 조교로 근무하던 여자 친구 덕분에, 우리는 학생과 직장인이라는 서로의 신분 차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여자 친구의 사무실은 3층이었고, 밖으로 창이 나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가면, 여자 친구가 그 창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교직원들이 드문 길로 캠퍼스를 걸었다. 건물 1층 입구의 자판기에서 코코아와 분말 우유와 커피를 뽑아 마셨고, 가끔 부랴부랴 광안리까지 걸어서 바다 바람을 쐬기도 했다. 그렇게 계절은 흐르고, 어느덧 가을이었다.


 우리 대학교의 캠퍼스는 봄에는 만개한 벚꽃으로,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으로 가득 찬다. 특히 여자 친구가 근무하던 건물 한쪽에는 유난히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은행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점심시간마다  함께 그 은행나무를 보며 수다를 떨었다. 여자 친구는 봄날의 벚꽃만큼이나 가을을 물들이는 그 은행나무를 좋아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나는 가까스로 졸업을 한 뒤 나름대로 돈을 벌며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고 여자 친구는 베이커리 쪽으로 직장을 옮겼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점심을 먹는다. 데이트라고 할 만한 건, 일주일에 하루 정도일 뿐이다. 출퇴근이나 식사 때에 맞춰 연락을 꼬박꼬박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각자 나름의 고충이 많았을 텐데도, 그 시절의 점심시간이 그립다. 몇 차례 비가 내리고 나면, 이제 곧 가을이다. 그 시절의 가을, 그 시절의 은행나무가 그립다. 기억에 색을 입힌다면, 그 날들은 아마 노오란 은행나무 색이리라.


   


그 여자


그 여자 보고 싶어서 가을 하늘이 높아졌다

가던 길 따라 집으로 갈까 하다가

에움길 돌아 그 여자네 집 창문 앞까지 왔다

3층 그 여자네 집 창문에 노란 은행잎 몇 장

내 마음보다 먼저 가서 붙어있고

나는 키 큰 은행나무 옆에 서서

가을마다 그녀가 사랑하던 노란 은행나무

커다란 한 잎으로 물든 은행나무

창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그 키 큰 은행나무 옆에 서서

문자를 보낸다


- 아름아, 창문 열고 나 좀 봐봐


8번 정도 읽었던 소설 속 여주인공을 닮았다

전주에서 본 엽서 속 풍경을 닮았다

그 여자 기다리며 편지를 쓰는 동안 흘러나왔던

이름 모를 재즈 음악을 닮았다

광안리 바다 위에 엎질러진 햇볕이

물결 따라 일렁일 때

눈 부시던 물비늘을 닮았다

서로의 가방을 머리 위 엎어 쓰고

비 내리는 거리를 뛰어 찰박이던 때

그 발자국 소리를 닮았다

사랑해, 그 말이 노란 은행잎을 닮았다


그 여자 닮은 것들이 많아서 아직도 설레는지

그 여자 웃으면 내 가을이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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