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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07. 2018

어두운 것이 되어

그림자는 존재의 증거

시집 <다시, 다 詩> '어두운 것이 되어'中

 잠들지 못하고 어두운 방에 누워 이런저런 돈도 되지 않는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시를 쓴다. 어쩌면 어둠만이, 어둑한 것들만이 존재의 증거이지 않을까 하고. 내가 없어도 세상은 환하지만 내가 서있는 까닭으로 내 등 뒤에 그림자가 눕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면 화창한 오후 가로수 그늘이 얼룩진 거리를 걷는 것은, 존재의 증거 아래를 존재로서 걷는 상쾌함이 아닌가 하면서.


 그러다가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의 빛이 아니라 그의 그림자가 되어주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림자를 지닐 때라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사랑할 때만 비로소 사람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면서. 


 오늘은 새벽이 다정하다. 불면도 평화롭다.



어두운 것이 되어


정오의 그림자가 되어 눕고 싶다

나의 한 뼘보다 조금 더 긴

너의 두 발 아래에


정오의 그림자처럼

네가 거의 나를 다 잊고 사는 동안

나만 너를 사랑하고 싶다


한 번도 빛을 등져본 적 없는 듯한 너에게

나는 최초이자 최후의 그늘이고 싶다

네 존재의 유일한 증거로

검게 누워 있고 싶다


내 키보다 한 뼘 정도 작은 네가 잠든 밤

자정의 그림자가 되어 눕고 싶다

너의 작은 방을 가득 덮으며


네가 거의 나를 다 잊고 꿈이라도 꾼다면

나는 기꺼이 너의 어두운 것이 되어

동틀 녘까지 너를 껴안고서

나만 너를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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