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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이 Apr 23. 2016

더딘 걸음이 닿은 곳

단편소설 연재 #1 (아마추어 글쓰기)

   "여행가자." 

   "괜찮아?" 

   "뭐가?" 

   "그냥."

   "가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럴까..."

   "그럼!"

    

  겨울을 닮아가고 싶은 듯하다가, 어느새 가을에 마음을 빼앗겨 붉게 물들어가는 계절, 우리는 그렇게 떠났다. 아니, 그렇게 들어갔다. 군대시절 거대한 중장비 없이 일렬로 서서 배수로에 쌓인 토사물들을 삽으로 퍼냈던 그 순간처럼, 우리에겐 거창한 이유도 거창한 무기도 없었다.

  사실 영주에겐 떠남의 이유가 필요했다. 집 앞 슈퍼에 갈 때도, 전날 야근 덕분에 늦잠을 자고 싶은 날에도, 배고파 모유수유를 요청하는 어린 딸처럼 명확한 인과관계가 필요한 유부남이기 때문에. 그런데 세 살 많은 영주의 아내 A에게도 이번에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었다. 민중이와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러 동네 대형마트로 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여행할 때면 늘 동행했던 ‘천하장사 소세지’.   

  

 "이거 먹으면 천하장사 되는건가?"

 "천하장사 돼서 그 힘 어디다 쓰게?"

 "글 쓰게."

 "글은 그냥 써. 천하장사 되서 쓰지말고."

 "모르시는 말씀." 

 "... ..."

  

"난 글 쓸 거야. 힘도 좀 필요해. 글 써서 여러 사람들한테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고 말해줄거야. 근데 말이지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려면 힘이 필요해. 세상이 살만한 곳인데, 그걸 알아야 되는 사람들은 힘이 없잖어. 그래서 난 천하장사가 될거야. 아니 그냥 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을만큼만 필요해. 그 힘이란게."

  "... ..."

  "너무 진지했나... 미안 미안 소세지나 사자."

  "다큐로 좀 받지 마라."

  "... ..."

  "... ..."

  "이 소세지 포장지에서 사는 아저씨 있잖아. 이 아저씨 좀 안됐어."

  "뭐가 또."

  "늘 이렇게 인상쓰고, 팬티만 입고 있잖아."

  "또 시작이다." 

  "아무래도 힘 쎈척을 하고 있는거 같아."

  "뭐래니."

  "그냥 그렇다고."  

  "소세지 안 살 거야?"

  "아니야, 아니야 소세지 사야지." 


  천하장사 소세지, 마트에서 제일 싼 목살, 원 플러스 원 과자 여러봉지, 민중이가 유독 외쳐되는 쌈무, 남자들끼리지만 우린 꽤나 알뜰히 장을 봤다. 백화점 일층을 그냥 못 지나치지만 늘 손에 들린 것은 행사 특가 만원하는 스카프뿐인 어머니처럼. 

  경식인 요리를 참 좋아했다. 아니 요리 하는 것보다 요리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이 요리를 잘하는 남자인 것을 확인 받고 싶어 했다. 다들 대학 캠퍼스 오월의 광장에서 떠들썩하게 술을 축내고 있을 때, 일본식 돈까스 전문점에서 주방보조로 일했던 일년 반을 경식이는 가끔 회상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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