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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아 이식 후 멈춰버린 시간 1.

by 당근쥬스

전쟁 같았던 과배란 과정과 전신 마취로 기억나지 않는 난자 채취와 수술방 천장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배아 이식의 시간을 거치고 나니 나는 이제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동결배아 한 개 성공의 충격에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나, 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이제부터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5일 배양을 이식한 사람은 이식 날부터 1일로 계산해서 10일째 되는 날에 병원에 가서 1차로 피검사를 한다.


3일 배양을 한 사람은 그로부터 이틀 뒤 1차 피검사이다. 난 날짜 계산을 잘못해서 이 병원은 왜 나한테 빨리 병원에 오라고 하는 거냐며 바보 같은 소리를 남편에게 했다. 이식 당일부터 카운팅을 해야 하는데 하루 빼고 계산했다.

이식 후 나는 이 표의 노예가 되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표보다 진행이 좀 빠르고 5일 배양은 보통 그날 저녁이나 그다음 날 착상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여태 내가 난임 병원을 다니면서 내 몸 상태를 본 바로는 자연적인 배란만 멀쩡히 잘 일어나지 그 외 시험관이나 어떤 병원에서의 처치에서 보이는 내 몸의 반응은 굉장히 느린 편이었다. 과배란 자극에도 반응이 느려서 남들 쓰는 약보다 훨씬 고용량의 약을 썼어야 했던 걸 보면 내 몸이 그렇게 흔히 알려진 순서대로 잘 가리란 보장은 없을 것 같았다.


이식을 하고 나면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해서 정말 가만히 있었더니 말 그대로 시간이 나에게로 와서 멈춘 것만 같았다. 군대는 다녀오지 않았지만 군대에선 시간이 절대 안 간다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하루가 억만년의 시간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집에서 놀고먹으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던데 이건 무슨 느림보 거북이는커녕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시간이 흘러갔다. 티비를 봐도 책을 봐도 인터넷을 뒤적거려도 시간이 너무나 천천히 흘렀다. 우리 집 소파는 이제 내가 하도 누워 있어서 쿠션이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태어나서 내가 이렇게 탱자탱자 게으름을 피워본 것이 대체 언제였더라?라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가득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과배란으로 주사는 끝난 줄 알았는데 이식 시점에 주사와 약이 바뀌어서 또 나온다. 아. 이거 진짜 네버엔딩이구나. 주사 놓는 시간, 질정 넣는 시간, 약 먹는 시간 다 다르다. 굳이 한 번에 맞추려면 맞출 수 있는데 주사는 너무 아프고 질정 넣고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 괴로우며 약은 밥을 먹고 먹어야 해서 한꺼번에 다 하긴 힘들었다.


핸드폰을 찾아서 각각의 행위를 해야 하는 시간의 알람을 맞췄다. 주사는 아침 일찍 맞으라고 해서 오전 8시 반, 약은 12시간 간격으로 아침, 저녁 식후 한 번씩, 질정은 12시간 간격으로 오전 11시 반, 오후 11시 반. 하. 내가 지금 회사를 안 가니 망정이지 이 짓을 회사 다니면서 하는 사람들은 진짜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이렇게 시간을 맞추는 게 사회생활하면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 모든 것은 시간을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강제로 과배란을 시도한 여자 몸은 호르몬 사이클이 무너진 상태이다. 보통은 생리가 끝나면 에스트로겐이 증가하다가 배란 후 프로게스테론으로 호르몬이 바뀌어서 분비되어야 하는데 에스트로겐을 과다하게 퍼부어서 난포를 키워댄 데다가 강제로 배란을 일으켜서 생체 시스템이 망가지면 프로게스테론이 분비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프로게스테론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착상이 일어나고 유지되는데 과배란 후에는 몸에서 프로게스테론을 만들어내지 않으니 인위적으로 호르몬을 공급해주어야 하는 것. 그래서 병원에서도 질정은 시간 맞춰서 넣으라고 꼭 주지 시키고 당부한다.


임신에 성공하면 태반이 만들어질 때까지 프로게스테론을 인위적으로 공급하고, 임신에 실패하면 바로 질정을 끊는다. 그럼 2~3일 뒤에 생리가 시작한다고 했다.


이 질정은 시간도 맞춰야 하지만 넣고 나면 약을 흡수시키기 위해 최소 30분은 누워있어야 했다. 자기 전에야 넣고 자면 그만이지만 낮엔 꼼짝없이 누워서 가만있어야 했다. 기름기 가득한 약 때문에 속옷이 엉망이 되는 것은 부지기수. 이걸 회사 다니면서는 절대로 못할 것 같다. 어디 가서 누워있는단 말인가? (아마 그런 경우 프로게스테론 주사로 바뀌어서 나오는 것 같은데 이 주사도 놓는 게 보통일이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착상을 위해 처방 나온 배 주사는 크녹산이었다. 크녹산은 난임인 사람들에게 악명 높은 주사이다.

주사를 놨다 하면 배에 멍이 시퍼렇게 든다. 그래서 주사 별명이 멍 주사이다. 그리고 주사약이 들어가는 동안에도 진짜 아프다. 주사를 놓을 땐 정말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주사액을 주사해야 했다. 바늘도 다른 주사에 비해 두껍다. 처음 찔렀을 때 배의 느낌이 안 좋으면 얼른 주삿바늘을 빼서 다른 부분에 찔러 넣어야 했다. 무시하고 그냥 아픈 부위에 주사를 강행하면 커다란 멍자국과 피를 볼 수 있었다. 과배란 때의 주사들은 진짜 우스운 지경이었다. 그렇게 쉬운 주사를 맞으면서 쩔쩔맸던가?

이 주사는 정말이지 주사를 놓을 때마다 피를 봤고 다 놓고도 아파서 끙끙거렸으며 자칫 잘못 건드린 날에는 배 여기저기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배에 여기저기 멍든 게 하도 기가 막혀서 사진을 찍어놨는데 혐짤이라... 못 올리겠다.


그리고 처방 나온 소론도라는 약은 부작용이 불면증이었다. 이 약은 면역 수치가 높은 사람에게 나오는 약인데 전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성 몸의 면역이 높으면 수정란을 이물질로 인식해서 공격한다. 그래서 배아를 살리려면 강제로 면역을 낮춰야 한다. 남들은 면역력을 못 키워서 난린데 면역력을 약을 먹어서 낮춰야 하는 현실. 그나마 난 먹는 약으로 되니 다행이었다. 면역 억제제를 링거로 맞아야 하면 그 비용이 장난이 아니었다.


슬프게도 이 약을 먹으니 밤에 잠이 안 왔다. 새벽 두세 시까지 침대에서 멀뚱멀뚱 그냥 눈만 감은 상태로 있었다. 이식을 하고 나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잠을 잘 자야 한다는데 새벽까지 잠을 못 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커피도 끊었는데 투 샷을 추가한 커피와 박카스를 섞어 마신 것처럼 잠이 안 왔다.


난 불면증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겪어봐서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그 전엔 불면증이면 밤에 잠 안 오니까 밤에 다른 일 하면 되지 않나?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불면증은 밤에도 낮에도 잠이 잘 안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사람이 폐인이 되는 것이었던 것. 이식하면 잘 자야 된다고 했는데 잠도 못 자고 몸은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았다. 남들은 시험관 시술을 하면 살이 팍팍 쪄서 스트레스라는데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살이 쭉쭉 빠지고 있었다.




이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했다.

뻑하면 내 배를 멍투성이로 만들고 주사 놓을 때마다 아파 죽겠는 크녹산을 계속 맞아도 좋으니, 소론도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뒤척여도 좋으니 우리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내가 다 견뎌보겠다고. 나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으니 길 잃어버리지 말고 그냥 건강하게 잘 우리에게 찾아와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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