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근쥬스 Sep 23. 2020

배아 이식 후 멈춰버린 시간 1.

전쟁 같았던 과배란 과정과 전신 마취로 기억나지 않는 난자 채취와 수술방 천장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배아 이식의 시간을 거치고 나니 나는 이제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동결배아 한 개 성공의 충격에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나, 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이제부터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5일 배양을 이식한 사람은 이식 날부터 1일로 계산해서 10일째 되는 날에 병원에 가서 1차로 피검사를 한다.


3일 배양을 한 사람은 그로부터 이틀 뒤 1차 피검사이다. 난 날짜 계산을 잘못해서 이 병원은 왜 나한테 빨리 병원에 오라고 하는 거냐며 바보 같은 소리를 남편에게 했다. 이식 당일부터 카운팅을 해야 하는데 하루 빼고 계산했다.

이식 후 나는 이 표의 노예가 되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표보다 진행이 좀 빠르고 5일 배양은 보통 그날 저녁이나 그다음 날 착상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여태 내가 난임 병원을 다니면서 내 몸 상태를 본 바로는 자연적인 배란만 멀쩡히 잘 일어나지 그 외 시험관이나 어떤 병원에서의 처치에서 보이는 내 몸의 반응은 굉장히 느린 편이었다. 과배란 자극에도 반응이 느려서 남들 쓰는 약보다 훨씬 고용량의 약을 썼어야 했던 걸 보면 내 몸이 그렇게 흔히 알려진 순서대로 잘 가리란 보장은 없을 것 같았다.


이식을 하고 나면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해서 정말 가만히 있었더니 말 그대로 시간이 나에게로 와서 멈춘 것만 같았다. 군대는 다녀오지 않았지만 군대에선 시간이 절대 안 간다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하루가 억만년의 시간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집에서 놀고먹으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던데 이건 무슨 느림보 거북이는커녕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시간이 흘러갔다. 티비를 봐도 책을 봐도 인터넷을 뒤적거려도 시간이 너무나 천천히 흘렀다. 우리 집 소파는 이제 내가 하도 누워 있어서 쿠션이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태어나서 내가 이렇게 탱자탱자 게으름을 피워본 것이 대체 언제였더라?라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가득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과배란으로 주사는 끝난 줄 알았는데 이식 시점에 주사와 약이 바뀌어서 또 나온다. 아. 이거 진짜 네버엔딩이구나. 주사 놓는 시간, 질정 넣는 시간, 약 먹는 시간 다 다르다. 굳이 한 번에 맞추려면 맞출 수 있는데 주사는 너무 아프고 질정 넣고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 괴로우며 약은 밥을 먹고 먹어야 해서 한꺼번에 다 하긴 힘들었다.


핸드폰을 찾아서 각각의 행위를 해야 하는 시간의 알람을 맞췄다. 주사는 아침 일찍 맞으라고 해서 오전 8시 반, 약은 12시간 간격으로 아침, 저녁 식후 한 번씩, 질정은 12시간 간격으로 오전 11시 반, 오후 11시 반. 하. 내가 지금 회사를 안 가니 망정이지 이 짓을 회사 다니면서 하는 사람들은 진짜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이렇게 시간을 맞추는 게 사회생활하면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 모든 것은 시간을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강제로 과배란을 시도한 여자 몸은 호르몬 사이클이 무너진 상태이다. 보통은 생리가 끝나면 에스트로겐이 증가하다가 배란 후 프로게스테론으로 호르몬이 바뀌어서 분비되어야 하는데 에스트로겐을 과다하게 퍼부어서 난포를 키워댄 데다가 강제로 배란을 일으켜서 생체 시스템이 망가지면 프로게스테론이 분비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프로게스테론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착상이 일어나고 유지되는데 과배란 후에는 몸에서 프로게스테론을 만들어내지 않으니 인위적으로 호르몬을 공급해주어야 하는 것. 그래서 병원에서도 질정은 시간 맞춰서 넣으라고 꼭 주지 시키고 당부한다.


임신에 성공하면 태반이 만들어질 때까지 프로게스테론을 인위적으로 공급하고, 임신에 실패하면 바로 질정을 끊는다. 그럼 2~3일 뒤에 생리가 시작한다고 했다.


이 질정은 시간도 맞춰야 하지만 넣고 나면 약을 흡수시키기 위해 최소 30분은 누워있어야 했다. 자기 전에야 넣고 자면 그만이지만 낮엔 꼼짝없이 누워서 가만있어야 했다. 기름기 가득한 약 때문에 속옷이 엉망이 되는 것은 부지기수. 이걸 회사 다니면서는 절대로 못할 것 같다. 어디 가서 누워있는단 말인가? (아마 그런 경우 프로게스테론 주사로 바뀌어서 나오는 것 같은데 이 주사도 놓는 게 보통일이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착상을 위해 처방 나온 배 주사는 크녹산이었다. 크녹산은 난임인 사람들에게 악명 높은 주사이다.

주사를 놨다 하면 배에 멍이 시퍼렇게 든다. 그래서 주사 별명이 멍 주사이다. 그리고 주사약이 들어가는 동안에도 진짜 아프다. 주사를 놓을 땐 정말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주사액을 주사해야 했다. 바늘도 다른 주사에 비해 두껍다. 처음 찔렀을 때 배의 느낌이 안 좋으면 얼른 주삿바늘을 빼서 다른 부분에 찔러 넣어야 했다. 무시하고 그냥 아픈 부위에 주사를 강행하면 커다란 멍자국과 피를 볼 수 있었다. 과배란 때의 주사들은 진짜 우스운 지경이었다. 그렇게 쉬운 주사를 맞으면서 쩔쩔맸던가?

이 주사는 정말이지 주사를 놓을 때마다 피를 봤고 다 놓고도 아파서 끙끙거렸으며 자칫 잘못 건드린 날에는 배 여기저기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배에 여기저기 멍든 게 하도 기가 막혀서 사진을 찍어놨는데 혐짤이라... 못 올리겠다.


그리고 처방 나온 소론도라는 약은 부작용이 불면증이었다. 이 약은 면역 수치가 높은 사람에게 나오는 약인데 전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성 몸의 면역이 높으면 수정란을 이물질로 인식해서 공격한다. 그래서 배아를 살리려면 강제로 면역을 낮춰야 한다. 남들은 면역력을 못 키워서 난린데 면역력을 약을 먹어서 낮춰야 하는 현실. 그나마 난 먹는 약으로 되니 다행이었다. 면역 억제제를 링거로 맞아야 하면 그 비용이 장난이 아니었다.


슬프게도 이 약을 먹으니 밤에 잠이 안 왔다. 새벽 두세 시까지 침대에서 멀뚱멀뚱 그냥 눈만 감은 상태로 있었다. 이식을 하고 나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잠을 잘 자야 한다는데 새벽까지 잠을 못 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커피도 끊었는데 투 샷을 추가한 커피와 박카스를 섞어 마신 것처럼 잠이 안 왔다.


난 불면증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겪어봐서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그 전엔 불면증이면 밤에 잠 안 오니까 밤에 다른 일 하면 되지 않나?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불면증은 밤에도 낮에도 잠이 잘 안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사람이 폐인이 되는 것이었던 것. 이식하면 잘 자야 된다고 했는데 잠도 못 자고 몸은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았다. 남들은 시험관 시술을 하면 살이 팍팍 쪄서 스트레스라는데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살이 쭉쭉 빠지고 있었다.




이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했다.

뻑하면 내 배를 멍투성이로 만들고 주사 놓을 때마다 아파 죽겠는 크녹산을 계속 맞아도 좋으니, 소론도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뒤척여도 좋으니 우리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내가 다 견뎌보겠다고. 나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으니 길 잃어버리지 말고 그냥 건강하게 잘 우리에게 찾아와 달라고.




이전 06화 난자 채취 후 배아 이식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