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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쥬스 Nov 25. 2020

난임 방학

그리고 유산 후유증

시험관 1차의 유산이 완료되고 난 뒤 뜻하지 않게 나는 난임 방학 기간을 맞이했다. 지난 6월부터 치열하게 달려온 약 6개월간의 난임시술 기간동안 몸과 마음이 시들시들해지다 못해 피폐해진 나에게 찾아온 일종의 휴식 기간이라고 해야하나. 당분간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뭔가 굉장히 프리하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생긴 약 두세달 정도의 방학에 뭘 하지?무엇을 하면 이 방학기간을 의미있게 보낼까? 하며 시간 잘 보내기에 골몰했고 결국 자격증 시험을 신청했다. 시험이 다가오니 그냥 삼개월 몸관리하며 푹 쉴것이지 뜬금포로 내가 왜 자격증을 딴다 했을까... 자책하며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또 브런치에 글을 끄적거리고 있다. 역시 시험 앞두고 하는 딴짓이 제일 재밌다!


유산 후 나는 그간 온종일 붙잡고 있던 난임 카페들과 임신초기 게시판에 더이상 들락거리지 않았다.


유산 후유증은 뒤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일단 난 이 방학이 너무 신났다)


어느정도 유산에서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자 나는 바로 호프집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시원~한 생맥주가 너무 마시고 싶었기에. (엄마한테 등짝맞을 일이지만) 그리고 백화점에서 메일로 보내준 와인장터 파일을 뒤져서 매우 신중하게 파일을 검토한 뒤 그동안 마시지 못한 와인을 왕창 구매해서 쟁여둔 뒤 남편과 함께 1일 1와인을 했다. 남편은 그간 혼자 마신 술은 정말이지 맛이 없더라는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를 했다.

정신줄 놓고 지른 와인들

그리고 그동안 소고기와 함께 주로 간이 덜 된 음식을 먹여두어서 매끈하고 잠잠해진 내 위장에 엽떡과 신전떡볶이와 마라탕, 짬뽕과 탕수육, 회 등등의 맵고 + 튀겼고 + 살아있고 + 전적으로 밀가루로 구성된 자극적인 음식을 잔뜩 들이부었다. 역시 사람은 밀가루와 인스턴트와 엽떡이 없으면 못사는거다!


밍밍한 음식에 길들여진 내 위장은 환호성을 질렀고, 입에서는 매우 맛있었지만 덕분에 며칠간 화장실에서 살아야 했다.


나는 이 방학기간을 마음껏 즐겼고 그 댓가로 그동안 시술로 고생해서 좍좍 빠져나갔던 몸무게는 2키로 정도 늘었다.


그간 미뤄뒀던 기생충약도 먹고 콧물이 나면 감기약도 편하게 먹었다. 그리고 올해 건강검진 대상자라 병원에 가서  당당하게 엑스레이도 찍었다. 그간 임신준비중이라고 몇년동안 엑스레이는 못찍었으니.


곧 시술을 다시 해야할 처지지만 어차피 시술 시작하면 다 못할 짓, 여한없이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차병원 쌤이 이 사태를 아셨다면 혀를 끌끌 차셨겠지.. -_-




유산은 출산만큼 몸에 데미지가 온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사실 출산에 비할 바냐 싶긴 하지만.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일단 머리가 뭉텅뭉텅 빠졌다. 가뜩이나 과배란 과정을 지나면서 빠진 머리가 돌아오기도 전이었는데 유산과 동시에 또 빠졌다. 후. 게다가 새치는 또 왜이렇게 심해지는건지. 흰머리가 눈에 확연하게 보였다. 염색을 바로 해야하나 싶었는데 엄마는 지금 당장 염색 안하면 뭔 일 나냐면서 몸 좀 추스르고 난 뒤에 염색을 하라고 하셨다. 덕분에 머리는 아주 볼성사나운 상태가 되었다.


아들을 둘이나 연년생으로 낳은 동생에게 빠진 머리는 도대체 언제쯤 돌아오냐고 물었더니 반년정도 지나면 잔디 인형처럼 머리가 나면서 돌아올거라고 너무 스트레스 받아하지 말라고 했다. 아... 반년이나 걸린다고...


늘 미용실에 가면 머리숱이 많아서 숱을 쳐야 했던 나였다. 숱이적고 머리카락에 힘이 없어서 정수리 뽕 파마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나였는데 이젠 내가 정수리에 뽕을 넣어야 할 판이었다. 머리숱이 줄어드니 사람이 참 없어보이는구나 싶었다.


머리카락만 빠진 것이 아니었다. 손목, 발목, 허리가 시큰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애를 낳은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시는건가. 아무래도 유산 진행 과정에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한 시기랑 맞물리면서 몸에 찬바람이 든게 분명했다. 난 아무것도 모르고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하고 안정을 취한다며 온수매트 속에 들어가 있다가도 몸이 더워지면 시원~하게 찬바람도 쐬고 했으니. 난 몸조리라는것에 정말로 무지했던거다.


엄마가 며칠간 머리도 감지말고 씻지도 말고 미역국 먹으면서 이불 속에서 가만 누워만 있으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땐 이미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뼈 시큰거리는 통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비가오는 날이면 더욱 심해진다. 예전엔 창 밖을 보고 아, 날씨가 흐리구나 라고 느꼈다면 이제는 뼈가 아파서 밖을 보면 아, 비가 오려고 흐리네. 라고 할 지경이 되었다. 마치 할머니 같다.


누군가가 유산했다고 하면 아무리 나 자신이 드러워도, 땀이 나도 무조건 씻지도 말고 이불속에 가만히 이틀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진리라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다...


정말이지 신기한 것은 그동안 굉장히 예민해졌던 후각이 정상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도 개코여서 냄새에 민감한 편인데 임신인 것을 알고 난 뒤엔 정말이지 냄새 때문에 삶의 질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향이 좋아서 잔뜩 쟁여둔 손 세정제와 바디클렌저들의 향이 구역질이 나서 제품을 사용할 수가 없었고 빨래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에도 헛구역질을 했으며 그 외 갖가지 냄새들 때문에 죽도록 괴롭더니 유산되고 나자 다시 그 용품들의 향은 좋은 향기로 느껴졌다.


아마도 임신이 계속 진행되었으면 그게 심각한 입덧으로 더 진행되지 않았을까. (다음에 만약 임신에 성공한다면 중증 입덧은 이미 사전 예약인 것 같다)




병원에서는 유산이 완료되고 난 뒤 약 40일 후 생리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고 그 생리 시작일 후 15일차에 병원에 내원하라고 했다. 몸상태와 시술가능 여부를 체크하기 위해서인것 같았다.


나는 약물로 유산을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두번째 생리가 지나면 시술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고(소파술을 하면 생리 1회 추가다) 아마 1월 쯤이면 신선시술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대충 계산해보니 1월 말이면 신선 시술 시작이 가능해 보였다.


병원은 수많은 사람들의 데이터를 누적시켜서 진행 과정을 안내해주는 것 같다. 시험관 시술은 주차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유산으로 진행될거라고 하더니 진짜 그렇게 되었고, 유산 후 40일 이내에 첫 생리가 시작될 것이라고 하더니 유산한 지 38일만에 생리가 시작됐다. 사람 몸의 시스템은 다 비슷한가보다.


이번 연말은 꼼짝없는(?) 난임 방학 기간이라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새해에 새 마음으로 다시 시술을 준비해야지. 드라마 산후조리원을 열심히 보면서 출산&조리원 예습도 했는데, 과연 내년에는 내가 아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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