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글 쓸 거다, 공표하기.
글을 쓰고 싶다고 공표했다. 너무 거창한 단어를 사용한 것 같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단어 선택이 아주 적절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무신경하다지만 나는 타인에게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남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어도 내가 남들을 많이 신경 쓴다. 많은 책과 강연에서 타인을 의식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이 그리도 쉬운 일이던가.
그럼에도 공표한 이유는 글을 쓰지 않아서다. 글을 쓰고 싶은데, 왜 글을 쓰지 않지? 상상 속에서는 글을 썼고, 책을 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다. 하지만 현실에는 하얀 백지를 마주한 인간이 책상에 앉아있을 뿐. 앉아있기라도 하면 그날은 나름 노력한 날이다. 무수히 많은 강연과 책에서 말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간절히 바라는 일을 남들에게 공개하라고. 공개하면 남들이 그 일을 알아봐 주고, 관심을 가져주기 때문에 더욱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두에게 통하는 일은 아니었다.
용기를 냈다.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모두가 응원해 주었다. ‘네가 글을 쓴다고?’ 등 상상 속의 각종 모진 말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너무 감사했다. 좋은 사람들이구나. 무엇을 하던 응원을 해주는구나. 마음 깊이 감사했다. 그리고 이 감사함이 다른 감정에 묻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떤 글을 쓸 건데?”
어떤 글? 뭘 쓸 거냐고? 그러게. 나는 뭐가 쓰고 싶은 걸까. 어떤 걸 세상에 공개하고 싶은 걸까. 내가 관심 있는 주제가 따로 있는 걸까. 내가 무언가를 잘하는 걸까, 지금까지 쓴 글은 에세이를 가장한 일기와 독서감상문, 대학에 와서 새로 알게 된 비평문이 전부이지 않은가. 나는 도대체 무슨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작가란 본디 자신을 위한 글이 아니라 타인이 읽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읽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글의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누군가를 위한 글을 써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남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추려보았다. 일단 수학과이니까 수학에 관한 글을 쓸까? 일개 대학 졸업장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수학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궁금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조사해 보니 수학에 대한 글은 대부분 선생님 혹은 교수가 썼다. 선생님이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수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쓴 것, 혹은 수학 교육과정을 한 권으로 빠르게 볼 수 있도록 정리해둔 것이다. 대학 강의를 위한 대학교재를 제외하고는 교수가 연구한 수학에 관한 것, 수학의 경이로움, 일상생활에서 만나볼 수 있는 수학 등이 있었다. 대학 졸업장 하나 가진 이가 쓴 글은 아직 찾지 못했다.
경제도 복수전공했으니까 경제에 관한 글을 써볼까, 그냥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에세이를 써볼까, 나도 소설에 도전해 봐? 뭐 이렇게 생각만 하다 보면 결국 생각에 생각에 생각에 꼬리를 물고 마주하는 것은 하얀 백지다. 머릿속에 전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고민만 하고 정작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지인을 만나면 요즘은 어떤 글을 쓰는지 물어왔다. 나 지금 쓴 글 하나도 없는데 어떤 글을 쓰냐니. 지난번에 글을 쓰겠다고 공표해놓고 꽤나 시간이 지났으나 쓴 글은 없다. 창피하다. 창피를 느끼지 않기 위해 하게 되는 걸까? 하지만 창피를 당해도 글은 쓰지 않았다. 아주 뚝심있는 자세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 일을 상기시켜줄 것이고, 곧 실행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이 부담이 되어 백지에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고, 저건 저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말이 혹시 가까운 누군가에게는 이런 식으로 들리지 않을까, 또 누군가에게는 저런 식으로 들리지 않을까. 있는 걱정 없는 걱정, 세상의 모든 걱정을 끌어안고 글을 썼다가 지우다가를 반복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안 써진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고,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릴 정도의 글은 아니다. 이 글을 과연 누가 봐줄까,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허공에 떠도는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오늘도 글 하나를 써보지 못하고 화면을 끈다. 언젠가는 쓸 수 있는 거겠지?
이렇게 생각만 하다가 도대체 몇 개월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내년에도 생각만 하고 있을 것 같다. 글 써야 하는데, 글을 쓰고 싶다. 생각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일은 더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러니 뭐라도 써야지. 글 쓰고 싶다며, 그럼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