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차례에 막힌 엄마 배웅

"엄마, 미안해"

by 꼭두

추석 차례에 막힌 엄마 배웅

"엄마, 미안해."


절대로 등을 굽히지 않던 엄마


제 친정엄마가 79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엄마 젊은 시절, 입버릇처럼 제게 하시던 말씀.


“나는 늙어서 절대 허리 꼬부리지 않고 쭉 펴고 살 거다.”


당시 시골 사시는 할머니들 보면 다들 말 그대로 꼬부랑 할머니였죠. 수십 년 동안의 논일, 밭일이 힘겨웠던 탓일 거라 짐작합니다.


한번은 엄마 나이 70 무렵에 제가 친정에 갔는데, 소식을 들은 엄마가 저 멀리서 바쁜 걸음으로 제게 오십니다. 새삼 엄마의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젊을 때 하시던 말씀 그대로였어요.


허리가 꼬부라지긴커녕 등이 꼿꼿하게 펴지다 못해, 뒤로 넘어질 것 같더라구요. 속으로 크게 웃었죠.


"저거 양반걸음이네. 허리가 굽을까 봐 아예 뒤로 젖혀서 걷는 생활을 하셨나 보다."


나이가 암만 들어도 생활 자세가 중요하다 싶더군요.


그렇게 꼿꼿하고 건강했던 엄마가 77세쯤 살짝 치매가 오면서 누워지내기 시작하더니, 79세 되시던 해 추석 전날. 서울에서 분주하게 차례 준비를 하고 있는 제게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힘드실 것 같다.”


멀고 먼 엄마 보러 가는 길


저는 참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답니다.


“오빠, 내가 지금 내일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침에 차례 마치자마자 바로 내려갈게."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의 시작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깟 남의 집 차례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당장 훌훌 손 털고 일어나 어서 엄마 임종을 지키러 가는 게 마땅한 처신이련만, 그놈의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의무감이 저를 바보로 만든 순간이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아무리 이 집에서 종부라지만, 제 집에선 맏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걸 옆에서 지켜만 본 시어머니와 남편도 두고두고 야속한 사람들이었어요. 제가 제일 큰 바보지만, 시어머니에 남편까지 셋 다 보태고 뺄 것도 없는 바보들 맞습니다.


저녁이 깊어 갈 무렵. 결국 오빠에게서 두 번째 전화가 왔네요.


“지금 막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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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손에 잡힐 턱이 있나요.


허망한 마음에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잠 한숨 자지 못한 채 밤을 새워 그 망할 차례상을 차려놓고, 시댁 일가 모이기를 기다려 서둘러 차례를 마친 후 집을 나섰습니다.


추석이면 귀성 전쟁이 정말 심했던 시절입니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요. 당연히 귀성 기차표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이던 때.


남편이 택시를 대절합니다.


그런데 차가 앞으로 나가지를 못합니다. 귀성 전쟁이 극심한 시절이었던 만큼, 추석 당일의 차량 정체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다 서다 가다 서다... 서울에서 공주까지 족히 7시간을 운전한 택시 기사도 초주검이 됐지만, 당시 차멀미가 심했던 저는 아예 실신 상태의 중환자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죠.


해 떨어질 무렵이 돼서야,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친정 대문을 들어서는 제 늘어진 모습을 오빠가 보더니 비명을 지르네요. 엄마 초상 치르려다 딸 초상까지 같이 치르게 생겼다면서.


그럴 만도 했습니다. 전날부터 심란한 속으로 잠 한숨 못 자고 밥 한술 먹지 못한 채 마음만 쓰다가 먼 길을 왔으니 성할 수가 없었지요.


속절없이 늦어버린 말들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엄마 친구분들이 다들 한마디씩 험한 말을 합니다.


가시는 엄마가 먼저지, 내년이면 또 오는 추석 차례가 뭣이 그리 중하냐면서, 며느리 일찍 보내주지 않은 시어머니 타박을 하는 거지요.


제가 뭐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저 넋두리처럼 중얼거렸죠.


“제가 시어머니 무서워서 일찍 못 온 건 아니고요.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도리와 사명감이 너무 깊이 박혀 그리됐네요. 제 잘못입니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그 후 몇 날 며칠에 걸쳐 엄마를 보내드리면서, 슬슬 시댁에 대한 원망이 쌓이더군요.


새삼 그날, 엄마 보러 못 가 애가 타고 있는 제게, 위로랍시고 미운 소리 보태던 동서 생각도 나고요.


"여자는 본디 출가외인이니 못 가도 어쩔 수 없어요, 형님."


미운 소리만 골라 하는 재주가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는 있던 동서지요. 그날은 제가 정신이 없어 두 귀로 흘린 말인데, 만약 제 눈 앞에 다시 나타난다면 그 입을 세 겹 네 겹 꿰매버리겠다 생각했답니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시어머니를 뵈니 제대로 울화가 치밀더군요.


보자마자 원망 섞인 이야기를 토해냈고, 시어머니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도 크게 화를 냈습니다.


“내가 시집 섬기는 데만 신경 쓰다가, 엄마 마지막 가시는 길 큰 불효를 하고 말았다.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시집와서 그렇게 큰 소리 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네가 늘 처신을 잘하니 네가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건 줄 알았다. 내 잘못이다.”


시어머니가 사과합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정말 미안해.”


남편도 나를 위로합니다.


그나마 했던 효도, 상복


엄마 보내는 길에 타박만 들었던 건 아닙니다.


칭찬을 자자하게 들었던 건 바로 ‘상복’입니다.


엄마 병세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던 무렵, 당시 한복 일을 막 시작한 제가 궁리를 했죠. 가난한 형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고.


광장시장에 가서 한복 원단을 잔뜩 사 왔습니다. 다섯 남매 상주들과 조카들의 상복을 지었습니다. 남자들 상복으로는 두루마기까지. 족히 삼십 벌쯤 되더군요.


엄마 돌아가시기 두 달 전쯤 여름, 공주로 엄마 병문안 가는 길에 그 상복을 여러 상자에 곱게 나누어 담아 큰 올케에게 전했습니다. 돌아가시면 열어보라는 말과 함께.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제서야 상복 상자를 열어본 친정 식구들이 감탄을 했다죠. 이렇게 곱고 이쁜 상복도 있냐면서.


문상객들도 입을 모아, 고인도 천수를 누리셨는데, 곱게 상복을 차려입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들 모습이 보기에 정말 좋다면서, 이 상복을 직접 지어 온 큰딸 칭찬이 온 동네에 자자했답니다.


삼우제까지 마치고 서울로 떠나는 날, 맏상주인 오빠가 저를 따로 부르더니 두툼한 봉투를 건네줍니다.


“네가 제일 큰돈 쓰고 큰 일 했다. 이걸로 맛있는 거 좀 먹고 몸 잘 추스르거라.”


불효로 가슴을 치고 있던 제게 엄청나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하지만 그 뒤로 한참 동안은 추석만 되면, 그 힘들고 원망스러웠던 차례의 기억, 남들은 즐겁게 가는 귀성길을 엄마 마지막 보내드리러 그리도 힘들게 친정집 찾아가던 생각에, 참 한 맺힌 중추절이었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더군요.


지금도 가끔 추석 차례상을 쳐다보다, 마지막까지 큰딸 기다렸을 엄마 생각에 눈물짓곤 한답니다.


"엄마,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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