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줌마인데 플러팅 당했다

20241127 현혹되는 삶의 연속

by 끼우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가슴이 벌렁거렸다. 뭐야 심장아. 사랑 고백의 글자만 보는데 왜 쿵쾅거리는 거야. 묵혀있던 연애 감정이 갑자기 올라오면서 설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퐁퐁퐁 샘솟고 오랜만이라는 시간의 띄어쓰기에 열 개의 글자에도 감정은 쉽게 흐느적거렸다. 평소에 쓰지 않던 새 물티슈 캡을 연 순간, 물티슈 구멍으로 막아놓은 스티커에 쓰인 문구였다. 사람이 아닌 물건에도 마음을 쉽게 줘버리는 여자다.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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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를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상대방을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에 느끼는 나의 감정은 쉽게 버릴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나이 마흔에. 감정은 나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이 새록새록 다시 느껴지는 경험의 희미한 반복이다. 경험하지 못했다면 흔들리지도 못한다. 어쩌면 내가 아껴야 했던 사람들의 감정들을 물건들처럼 버리지는 않았을까. 되짚어보기도 했다.



내가 왜 저 문장에 현혹되었는가


내 삶의 여유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양육에 국한된 ‘희생’으로 바꾸지 않았다. 내가 나로서 내 삶을 찾으려고 애쓰는 이성이 있다면 감성은 아직도 엄마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저 물티슈를 뜯는 순간에는 엄마 역할 따위는 없었다. 나의 이성이 나의 감성을 찾아낸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불일치로 매 순간이 어떤 역할에 매몰되어 매 순간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누군가의 엄마이면서 딸이면서 각 모임의 회원이 되면서 느꼈던 감정들은 언제나 이성과 감성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



글은 오롯이 내가 되는 일을 허락했다


이성과 감성은 현실과 이상처럼 양분될 수 없으며 흑백논리처럼 선을 긋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가능 한 곳이 있다. 글을 쓰는 일이다. 유일하게 온전히 나로서 할 수 있다. 나의 감정과 나의 이성이 어떤 역할에 빠지는 게 아니라 그냥 오롯이 내가 되는 일. 마음껏 어린아이가 되었다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할 수도 있는 그런 세상. 글 안에서는 가능했다.



뽑기가 아닌, 모두 같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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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궁금했다. 물티슈 속 스티커의 내용이 같을까? 다를까?

몇 개 더 꺼내서 보기로 했다. 웬걸, 다 같은 문장이었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의 반복


물티슈 쓰는 아줌마들을 이렇게 플러팅 하기로 물티슈 마케팅 담당자는 작정했다. 물론 오늘부터 이 물티슈 쓰는 거야!라는 말이지만 이게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는 그대로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용당한 마음이지만 잠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런 속셈이었으면 나에게는 적어도 이 마케팅이 성공한 셈이다. 어쩌면 이런 게 요즘 젊은이들에게 유행한다는 체험마케팅인가. 체험했으니 나도 선구자인 셈인가.



글자를 말로 바꿔서 다른 경험을 획득했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 글자에 나의 마음이 흔들렸노라고. 그래서 남편에게 주문했다. 이 글자를 나에게 말로 해달라고. 문자가 아닌 말로 다른 경험으로 새기고 싶었다. 사람이 아닌 것에 플러팅 당해서 기분이 묘하지만, 남편에게 플러팅 당하면 그래도 좋겠노라고 설명했다. 남편은 황당해하면서도 이내 피식 웃더니 말했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그런데 우리는 이미 12년 차 부부인데 뭐가 오늘부터 1일이야. 아이를 키우는 동료애의 1일을 말하는 거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 많으니 함께하기로 약속한 1일인 거야? 앞으로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한 게 1일인 거야? 생략된 남편의 앞부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내가 시켜놓고도 내가 의심한다. 마치 “사랑해”라는 단어 앞에는 ‘지금만’, ‘내가 사랑하는 한’ 이런 것들이 생략되었다는 사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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