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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불리는 이름

1-1

by 슬기롭군

햇볕이 뜨겁다.

산등성이 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 너머 숲은 죽은 듯 고요하다. 새 한 마리가 소리 지르듯 울고 사라진다. 단지 더위 탓은 아닐 것이다. 이 고요 속엔, 무언가 곧 터질 것 같은 긴장이 흐른다.


진지 안은 숨죽인 동굴처럼 조용하다.

우리는 지금 기다리고 있다. 어떤 명령도, 어떤 확신도 없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곧 시작될 거라는 걸.

누구는 담배를 베어 물고, 누구는 군화끈을 다시 조인다.

나는 그저 눈을 감는다. 이 작은 어둠 속에서 잠시 다른 세상을 꺼내본다.


“김칠수.”


내 옆에서 누군가를 부른다.

소대장이 아니다. 얼마전 같은 진지에 편성된 이태석 일병이다. 그의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헬멧에 흙이 잔뜩 묻었다.


“너, 이름 불리면 어떤 기분이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난 말야. 이름 들을 때마다, 내가 아직 ‘사람’인 것 같아. 살아 있는 인간.”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이곳에서는 이름도, 얼굴도, 심지어 말투도 뭉개진다.

죽으면 군번줄 하나에 의지해야 하고, 살아 있어도 언제 죽을지 몰라서 ‘이름’이란 것이 의미를 잃는다.

하지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면 그 한순간만큼은, 살아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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