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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Oct 27. 2020

독립심을 기르자

OO엄마, OO아내 말고! 진짜 나를 찾으려면

육아를 하다 보면 진정한 나의 민낯을 보게 된다. '이렇게도 내가 성질이 까칠했던가?', '원래 이렇게 분노가 많았던가?' 하며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돈 벌고 잘 나가던 직장인이었는데’라는 하소연이 절로 나온다. 


아이를 키우느라 반 강제로 사회생활이 중단되면서 겪는 공허감과 동시에 배우자가 벌어오는 돈에 의지해서 얹혀사는 기분이 들 때 느끼는 우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회생활 10년, 육아 경력 10년을 통해 남은 거라고는 전투력 밖에 없다고나 할까. 


물론 사회생활을 이어온 워킹맘의 경우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여전히 주어진 수많은 역할을 감당하느라 버거울 것이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육아’는 엄마의 절대적인 책임이라는 무언의 압박감으로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내 몸 챙기기도 급급한데, 아이도 챙겨야 한다. 남편은 제발 스스로 했으면 좋겠는데 자기도 챙겨달랜다. 특히 아이가 아프면 더더욱 절대 갑이 되어 나를 미치게 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런 험한 꼴 보려고 결혼을 선택한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애는 안 낳는 건데, 하나만 낳는 건데… 후회해 봤자 이미 수습 불가. 누구를 탓하랴. 그토록 아이가 갖고 싶어 처절하게 노력하고, 뜨겁게 사랑해서 빨리 이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먹고 자고 싸는 1차원적인 기본 욕구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극한 나날들이 이어지면서 엄마들은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인생 바닥을 찍던 시절 영유아기가 지나고 슬슬 살만해지고 난 후 정신을 차려보면 정작 ‘나’는 없다. 그때부터 자아성찰이 시작된다. 분명 객관적으로 예전보다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답답하다. 그리고 자신감이나 자아성취감은 수직하강 중이다.


‘엄마의 사춘기’를 겪으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의존적으로 생활했는지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작은 일 에도 선택 장애로 골머리를 앓고, 내 의견보다 남 눈치 보며 아등바등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 이 상태를 바꾸고 싶었다. 그동안 나는 무언가를 스스로 하기보 남편, 친정, 시댁, 육아 동지들에게 상당 부분 의존하며 기대어 살았던 것 같았다. ‘진짜 나’를 찾아야겠다 싶었다. 팍팍한 내 삶을 헤쳐 나가려면 '굳건한 독립심 장착'이 필수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소싯적부터 독립심이 강한 줄 알았다. 여대생이 혼자 당당하게 설렁탕집에 가서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혼밥을 하기도 하고, 씩씩하게 혼자 영화관도 종종 갔다. 친구들과 미용실을 같이 간 적도 내 기억에는 없다. 그래서 나는 독립심이 강한 여자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의기양양했던 나도 막상 엄마가 되어보니 밀려오는 우울증과 무기력감은 당할 재간이 없었다. 결혼 출산 육아 이전의 삶에서의 독립심이란 ‘단순한 행위로써의 독립적인 행동’이었지 진정한 ‘심리적인 독립’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반쪽짜리 독립심으로 진짜 어른이 되기란 어림도 없었다.    


육아와 살림, 일까지 병행하다 보면 만신창이가 된다. 당연히 참 고된 일이다. 하지만 내내 죽겠다며 하소연하고 신세 한탄을 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점점 의존 감만 높아지고, 점점 자존감은 떨어진다. 아무런 발전이 없다. 엄마들에게 진정한 독립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로 남편으로부터, 양가 부모님들로부터, 육아 동지들로부터. 이 삼종세트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다.


이들은 물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무조건 모든 도움을 단박에 끊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육아 독립’을 목표로 두고 살아야 한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현실은 팍팍하지만 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한 목표를 갖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태극기를 품은 독립군처럼 말이다. 조금씩 내 힘으로 스스로 해내고, 내 인생을 소신 있게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제는 진짜 어른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이들로부터 어떻게 독립하는 게 효율적인지 함께 생각해보자.




1) 남편으로부터의 독립

남편은 결국 ‘남의 편’이다. 절대 내 입장이 되어 줄 수 없다. 때로는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알아서 살림을 도맡아 해주기도 하지만 사실 그때뿐이다. 죽도록 힘든 육아 지옥을 나 대신 온전히 딱 하루만 경험해 본다면 조금 태도가 달라질까? 내가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이야기해봤자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못다 한 게임이나, 사고 싶은 최신 운동화 쇼핑 생각뿐이다


나의 경우 남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실망감이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나 혼자 해볼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남편 의존 성향이 강했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심지어 병원을 갈 때 조차도 꼭 남편을 대동하고 갔다. 물론 둘이 되었을 때는 접이식 쌍둥이 유모차에 마을버스 타고 나 홀로 악착같이 애들을 데리고 다녔지만. 아무튼 남편 없이는 외출도 꺼려졌고, 공동 육아와 공동 살림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같이 감당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속상하고 서운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의 원천은, '내 그를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편은 남편의 성향대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내 뜻대로 따라오지 않는다 한들 굳이 서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나와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것, 그게 진리였다.


또 하나 남편으로부터의 독립에 필수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운전'. 이미 운전이 가능해서 해당되지 않는 엄마들이라면 축복받은 사람이라 이야기해주고 싶다. 나는 운전을 못하니 어딜 가든 난관이었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늘 부탁해야 했고, 갖은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래서 둘째가 어린이집에 잘 적응한 후에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운전연수부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이다. 기동성이 확보되니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남편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언제든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적인 삶이 확보된 것은 당연지사.


이제는 남편이 없는 게 오히려 편할 때가 있다. 육아 선배들이 했던, 그때 당시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던 까마득한 먼 미래의 일'이라고 여겼던 명언이 어느덧 나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유일하게 ‘운전’으로 남편의 존재가 꼭 필요했다면 이제는 그 마저도 안녕. 그래도 장거리나 야간 운전을 할 때는 남편이 필요하긴 하다.


가구 옮기기, 에어컨 분해 청소, 커튼 봉 달기 등과 같이 물리적인 힘이 필요한 경우 때에 따라서 차라리 심부름 업체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다. 몇 푼 아껴 보려다가 감정만 상하고, 남편과 사이만 더 멀어진다. 배우자가 도와줄 용의가 있거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며 노동력을 적당하게 활용하면 끝.


아무튼 남편 없이 꼼짝 못 하는 엄마들이여, 용기를 내기 바란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하고 훨씬 더 자주적으로, 편하게 살자.


2) 양가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

육아에 있어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친정이고 시댁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시고,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사랑도 베풀어 주신다. 참 감사한 분들이다. 하지만 이 또한 주의가 필요하다. 마치 공기, 물, 햇빛과 같이 그 중요성은 알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에서는 막상 존재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여기며 사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툭하면 친정 찬스를 쓰고, 보내주시는 반찬을 아무 감동 없이 받고 오히려 남겨서 버리거나 안 주시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보자. 오히려 아이를 맡아 주실 상황이 못 되시고, 반찬을 안 보내주시는 부모님들이 있다면 감사하게 생각하자. 


“저는 회사를 다니다 보니 요리를 잘 못해서 다 시댁에서 얻어먹어요”라는 말은 결코 자랑이 아니다. 아무리 업무로 바쁘다 한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본업은 '엄마'이다. 반조리 식품이나 반찬가게를 이용할지언정 자꾸 양가 어머님들에게 손 벌리지 말자. 이제 몸도 아프기 시작할 연세이신데, 오히려 내가 반찬을 해 드리는 경지에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나도 지금도 여전히 급할 때는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요청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시로 나의 호출을 감당해 주셨다. 하지만 이런 긴급한 도움이 자꾸 많아지다 보면 고마운 감정이 점점 무뎌진다. 남편의 경우처럼 오히려 도움을 못 받는 상황이 되면 서운한 감정만 앞서게 된다. 마치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 인 셈이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의존적으로 변하게 되고 고마운 줄도 모른다. 여전히 우리는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닌 어른 흉내를 내는 '어설픈 어른'일 뿐이다.


어느새 부모님들도 우리를 키우시느라 부쩍 늙으셨다. 이제는 인생 후반은 편하게 보내 시도록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삼사십 대인 우리도 이제 충분히 내 앞길을 책임지고, 어른 노릇을 해야 하는 게 맞다. 아직까지도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얽매여 꼼짝 못 하게 붙잡고 있다면 결코 나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의식주도 나와 배우자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지, 친정과 시댁에게 전적으로 맡겨서는 안 됨을 명심하자. 도움을 받는 횟수를 점점 줄이고,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선택적으로, 최소한으로 도움을 받자.


3) 육아 동지들로부터의 독립

가장 쉽고도 어려운 것이 바로 육아 동지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심을 갖는 것이다. 조리원 동기, 동네 친구들, 문화센터 같은 반 엄마, 어린이집 엄마들 등등 비슷한 월령대의 자녀를 키우는 처지이다 보니 공감대가 금방 형성되고 친근감이 절로 드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똘똘 뭉쳐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때로는 절제가 필요하다.


내 주변에서 삼삼오오 마음이 맞는 또래 엄마들의 모임을 볼 때, 아무런 갈등 없이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는 모임을 찾기란 힘들다. 형제자매끼리도 투닥거리는데, 하물며 남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온다는 건 쉽지 않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오해도 생기고, 갈등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일상생활도 껄끄러워지고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지인이 산후조리원 동기들을 주 5회 이상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에 나는 속으로 기겁한 적도 있다. 과연 이런 모임이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얼마나 도움이 될까? 결국은 어떤 학원이 좋다더라, 어떤 장난감이 좋다더라, 전집은 어떤 책이 인기가 많더라 등등 팔랑 귀가 되어 소비만 부추길 뿐이다. 그리고 남과 비교하며 나만 뒤쳐지는 느낌을 받게 되고 자연히 조바심만 뒤따른다. 사회성을 키워준다는 핑계로 같이 모여 배달음식과 동영상 찬스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역기능만 있는 건 아니다. 꼭 필요한 좋은 정보를 얻기도 하고, 자녀들도 친구와 어울려 즐겁게 놀 수 있다. 어쩌다 한 두 번 갖는 모임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일탈이 되어 준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집중하고,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면
자발적인 고립된 생활도 필요하다.
그래야 주변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자신만의 잣대가 생기고,
판단 기준이 생기고,
그때 비로소 소신 있게 행동할 수 있다.

또래 엄마들과 모임에서 과연 ‘나’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나의 진로나 나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비중이 얼마나 차지하는가? 남편 험담, 온갖 추측성 카더라 통신, 시댁과의 에피소드, 부동산 이야기 등 뻔한 레퍼토리만 읊다 보면 돌아서서 집에 왔을 때 허무함만 밀려온다. 그 시간에 차라리 동네 공원이나 한 바퀴 뛰고 올 껄, 읽던 책이나 마저 읽을걸 하며 뒤늦은 후회만 남는다.


학원이고 학습지고 선택 기준이 최소한 ‘아이의 관심사’가 돼야지 친구나 다른 엄마들의 선택을 쫒아갈 필요는 없다. 운동 수업 그룹에 끼지 못했다고 친구들을 못 사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두 아이 키우며 문화센터는 문턱도 못 밟아봤지만 구에서 운영하는 무료 육아지원센터는 혼자 아이들과 함께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태권도나 수영과 같은 운동은 한 번도 등록해 본 적은 없지만 동네 놀이터나 한강공원은 날씨만 좋으면 언제든 출동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너무 시시콜콜 정답이 없는 이야기 나누기보다 육아 멘토이자 인생 대 선배 몇 명과 가까이 지내며 연락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남편 때문에 분개하던 나를 보고 일단 이리 와서 앉아보라며 맛있는 빵은 입에 쑤셔 넣어 주던 노련한 언니, 전화와 카톡으로 짧지만 수시로 안부를 묻던 내공 만점의 언니, 책에 있는 교과서다운 답 말고 시원 상쾌하게 현실적인 조언을 사이다처럼 말해주던 언니… 내가 쓰러졌을 때마다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의 원천들이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살만해지니 나 또한 자발적으로 어린 자녀들을 둔 초보 엄마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려 애쓰고 있다. 받은 은혜 나누기랄까.




이 세 집단으로부터 독립을 이뤘다면 그다음으로 갖춰야 할 것은 바로 ‘내 공간 마련하기’이다. ‘엄마 독립심 마련의 꽃’ 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최소한 "집이 좁아서 공간이 없어요"라는 생각을 버리자. 화장대 대신 책상을 선택한다든가, 하다못해 1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접이식 책상이라도 구비하자. 그곳에서 노트북을 켜서 글도 쓰고, 이런저런 생각도 정리해본다, 장단기 계획도 세워보고, 관심 분야의 독서도 하는 거다. 가족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혹은 아이들 재우고 저녁시간에 1~2시간이라도 내 공간에서 내 시간을 짜릿하게 보낼 수 있다.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지 않는가?  



행복해지는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을 잘 관리하고,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가꾸는 것. 그래야 아이들에게도 남편이 나를 뒤흔들어 놓아도 큰 요동 없이 의연하게 대처할 여유가 생긴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점차 독립을 하고 

조금 천천히 남들과 다른 길로 가더라도

내 방식대로 삶을 살기로 결정하면 그만이다. 


최소한 앞으로의 인생은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내 인생을 내가 주도적으로 살기를


이것이 정답임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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