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연작소설
당신은 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 다자이 오사무 선집을 읽고 있었다
덜컹덜컹 전철의 작은 진동이 계속 됐지만 당신의 책은 미동도 없었다
4월의 완연한 봄은 그런 당신의 얼굴에 쨍한 빛을 드리웠다
하얀 옥스포드 남방에 발목이 보이는 테이퍼드 진,
그리고 뉴발란스 스니커즈.
내 눈은 내 신발로 옮겨졌다
우리 회사는 운동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3센치 굽이 반듯하게 붙은 검은 로퍼가 그날은 더 창피했다
대방역을 지날 때쯤 당신 뒤로 노오란 개나리가 내달렸다
당신의 얼굴에 노오란 웃음이 그려지는 듯했다
불쑥, 당신과 노량진에서 내려 한강으로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모르는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어본 적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당신의 스니커즈에 비해 내 로퍼는 너무 지루했다
당신은 노량진역에서 내렸고 나는 그곳에 미련을 남긴 채 강을 건넜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당신을 만났다
아니 당신을 발견한 것이지만 마치 약속하고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은 오전에 외근이 있었기에 시간이 여유로웠다
나는 당신을 따라 노량진역에서 내렸다
당신은 인파에 묻혀 개찰구로 쓸려각 있었지만
그날 입은 노란 남방은 스포트라이트처럼 빛났다
역을 벗어나니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당신은 육교로 올라섰다
내 걸음은 바빠졌다
계단 끝에 오르자 당신과 거리가 벌어졌다
마음이 바빠졌다
그래서 더 앞뒤 잴 생각없이 돌진했다
"저, 한강 갈려면 어디로 가야해요?"
거칠게 숨이 터져나왔다
입을 다물지 못한채 계속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침 8시 반의 풍경치고 누가봐도 어색했다
더구나 이 여자는 당신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노량진이기에 이교도라 생각해도 충분할 여자였다
"한강은 반대편입니다"
8자가 굴곡 없이, 고르게, 같은 높이로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당신의 팔꿈치를 잡은 내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우린 그 주 토요일에 여의도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무릎을 살짝 덮는 하얀색 치마에
노란색 반스 운동화를 신었다
우리는 키가 한 뼘쯤 차이가 났다
당신은 나보다 앞서 걷다 이내 알아차리고 나와 보조를 맞췄다
당신 발에 내 발을 맞추고 싶어
나는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당신의 보폭이 넓었기에 나는 뛰듯이 걸어야했지만
당신은 또 이내 보폭을 줄여 나를 감동시켰다
우리의 신발은 그렇게 한강으로 씩씩하게 나아갔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말들이 오고갔지만
나는 당신 얼굴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우리 신발 코에 눈을 두었다
"내 팔을 붙잡던 그 용기는 어디 갔어요?"
당신은 웃으며 나를 채근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지만 웃는 것 외엔 달리 말을 못했다
당신도 같이 웃어줄 뿐 나를 더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일었고
삶의 하이라이트를 보낸 벚꽃잎은 바람따라 날렸다
키가 큰 당신의 머리와 어깨에 꽃잎이 스쳤고
또 내 얼굴에 닿고 손을 스쳐 치마 위로 굴렀다
걷는 내내 우리 발에 벚꽃잎이 휘감겼다
당신과 왜 헤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1년을 못채웠을 게다
헤어지는 날은 추웠고
우리 발에는 눈이 밟혔었다
그때도 우린 별 말이 없었다
어쩌면 우린 사귀는 내내 별 말이 없었을 수도.
누군가 특별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니었을테고
누군가 붙잡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지만
당신 또한 놀라지는 않았다
매년 봄이면 우리가 걷던 거리가 TV에 나오니
그때면 의례적으로 당신을 추억한다
하지만 만났던 10여개월의 기쁨과 행복보다
나는
봄볕을 받던 그 하얀 얼굴과
다자이 무사이 선집을 잡은 하얀 손과
청바지를 벗어나온 하얀 발목,
그리고 크고 날렵한 뉴발란스 스니커즈만 기억난다
당신에게 미안한 건
어쩌면 내가 당신의 그 바쁜 발길을 1년여 붙잡아둔 건 아닌가 하는 회한이다
당신의 기억에 나와의 시간이 검은 로퍼처럼 지루한 흔적은 아니었을지 걱정도 든다
"잘 지내시죠?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부디 다자이 무사이를 동경하지는 말아주세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