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게 내 새 사업아이템이다."
동네 선술집에 앉자 마자 친구가 내놓은 건 여성용 토이였다
남사스러운 물건을 누가 볼새라 급히 가방에 쓸어담고 술잔을 채웠다
온라인 반찬가게를 한다고 7년 전 회사를 뛰쳐나가더니 이제는 성인용품을 팔기 시작했다
원래 보통은 아닌 놈이었다
S는 대학 입학식 때 처음 만났다
식이 시작하고서야 들어온 S는 허겁지겁 내 옆 자리에 앉았다
멀대처럼 큰 키에 삐쩍 말라서 볼품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입은 스트라이프 블루 셋업은 멋스러웠다
'아... 이런 양복이 서울 양복이구나.' 주눅들게 했다
며칠 전 영등포역에 내리자마자 지하상가를 뒤져
파란색 트렌치코트를 사고 서울사람 다 된양 감상에 젖었었는데
S의 셋업에 내 코트는 돕바가 돼버렸다
우리는 옆자리 인연으로 바로 친해졌다
오타쿠 기질이 있었던 S는 여러모로 재밌는 놈이었다
컴퓨터 게임, 만화, 힙합, 서태지를 좋아했다
평범을 거부하던 습성때문에 S는 광고를 공부했다
평범에 안주하던 나는 신문을 공부했다
그래도 우리는 역사동아리에 묶여 단짝으로 보냈다
2학년을 마치고 S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인제로 군대를 갔다
입대 전날 S는 내게 미안하단 말을 수백번 했다
'널 혼자 남겨두고 군대 가서 미안하다'
연인에게나 할 말을 S는 맨정신에도 술에 취해서도 같은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학생회를 맡아 3학년을 학교에 묶였기 때문이다
평범에 안주하던 나였기에 나는 탈주할 용기도 타이밍도 찾지 못했었다
나는 1년 후 마침내 군대로 도피했다
여자친구와 동지들보다 S에게 더 편지를 많이 받았다
제대를 앞두고 S는 내게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또 다른 K와 함께 우리 셋은 반지하 투룸에 같이 살았다
2년여의 동거는 쉽지 않았다
우린 시간과 공간을 겹쳐 살기에 너무 달랐다
S와 K는 매일 컴퓨터게임을 하며 새벽을 지새웠다
저녁이면 학교 동기, 선후배들을 집에 끌어왔다
빨랫거리는 쌓여가고 먼지는 뭉쳤으며 홀애비 냄새는 삭아갔다
입대부터 계속 '과거의 학교생활'에서 도피하던 나였기에
나는 학교에서도 수업만 듣고 사람들 접촉도 최소화했다
그래서 하교 후 집이 학교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게 싫었다
어느날 셋이 술을 마시면서 그런 내 생각을 말했다
둘은 내게 사과하며 술을 권했다
머쓱해진 나는 술로 민망함을 지웠다
다음날 해장을 위해 일어나자마다 시장에 나갔다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 두부, 호박, 감자 등을 샀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레시피를 받아 끓였다
늦게나마 일어난 애들이 반은 감긴 눈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된장찌개를 맛본 S가 눈을 틔우고 "우리 엄마 찌개보다 맛있다."며 칭찬했다
후에 S는 내 된장찌개에 자극받아 요리를 더 열심히 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동거 2년 후 나는 독립했다
반지하에 질린 나는 옥탑방을 선택했다
한강이 보이는 높은 언덕 끝 옥탑방은 시골내기에게 나루터였다
몇달 후 S도 곁으로 이사왔다. K는 취업해 지방으로 갔다
우린 또 매일 같이 저녁밥을 함께 먹으며 동거 아닌 동거를 했다
그 즈음 나는 S의 회사에 입사해 잠 자는 시간 빼고 항상 같이 있게 됐다
내가 J를 사귀면서 만나는 시간이 뜸해지자
S는 J의 친구를 사귀면서 다시 자주 보게 됐다
2년 후 나는 J와 결혼했고, S는 결혼식 사회를 봤다
부모님께 절하는 순서에서 나는 엄마 얼굴을 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져 눈을 돌렸다
눈은 S의 얼굴에 닿았다
S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소처럼 큰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다시 엄마의 얼굴을 향했고 떨어지는 눈물이 들킬새라 머리 숙여 절을 했다
나는 결혼 후 서울의 남쪽에 자리 잡았다
1년 후 S는 J친구와 헤어지고 대학 때 만났던 후배와 결혼했다
S는 우리집에서 500미터 거리로 이사왔다
서울에 부모, 형제가 없던 우리에게 우리는 서로 형제였다
스타트업 바람이 불면서 S의 엉덩이도 가만 있지 못했다
식당을 하시는 엄마 밑에서 자랐던 S라 장사에 관심이 많았다
팀장 승진을 목전에 두고 S는 사표를 던졌다
용기와 결단에 있어서는 가히 재벌집 막내아들급이었다
엄마와 반찬가게를 하겠다는 계획은 점점 부풀어
온라인 반찬쇼핑몰이라는 거대한 배가 돼 닻을 올렸다
당시에는 몇몇 작은 몰들이 경쟁하던 시기여서 블루오션이었다
지켜보던 모두가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다
회사에 남았던 나는 여전히 야근과 클라이언트 갑질을 이겨내며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고 있었다
자신만의 일을 스스로 해내가던 S는 만날 때마다 힘차고 씩씩했다
사업 사이즈가 커진만큼 준비기간과 예산이 커졌지만
이래저래 구멍을 메꿔가며 꿈과 희망의 크기를 키웠다
서로 일이 바빠 전보다 만나는 날이 줄어들었다
쇼핑몰 런칭 2년이 지날 때쯤 S는 내게 자금난을 호소했다
술이 취해갈 땐 내게 웃으며 "넌 로또도 안 되냐!"며 타박했다
다음날 전화한 S는 어제 많이 취했다며 다 잊으라고 당부했다
그 후 2달 후 난 이직을 했다
S와 함께 다니던 회사에서 15백여만원의 퇴직금을 받았다
퇴근하고 아내와 술을 마셨다
아내가 고생했다며 퇴사를 치하했다
그런 아내에게 "퇴직금 천만원만 내가 쓰면 안 될까?"라고 물었다
아내는 이유도 묻지 않고 안 된다고 했고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S에게 지금까지 이 얘기를 하지 않았고
아내도 그때 왜 돈이 필요했는지 아직까지 묻지 않았다
입을 닫은 모두는 비겁했다
그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난 작년 가을
S는 신박한 사업아이템이 있다며 보자고 했다
7년여간 내가 들은 아이템만 10가지가 넘었다
S는 사업의 무대는 모텔과 호텔 등 숙박업소이며
업소 내에서 음식을 조리하여 배달하는 룸서비스 플랫폼이라고 했다
이미 많은 주변인들이 대박날 아이템이라 평가했다며 신나했다
불행히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S가 본인의 사업만 바라보고 달려올 때
나는 수많은 사업들을 파트너로 일해왔다
나는 역시나 십 몇번째인 그 아이템에도 박한 점수를 줬다
S는 "넌 역시 부정적이야!"라며 잔을 드높였다
그 후 4개월만인가?
음식 룸서비스는 숙박업소 사정상 쉽지 않게 됐다며
대신 성인용품 룸서비스를 하겠다고 내게 샘플을 보여준 것이다
속으로 난 차라리 현실에 맞다 싶었다
이번에는 긍정적으로 응원하며 축배를 들었다
채우고 채우며 새해를 맞아 희망을 더 부풀렸다
그간 세월은 녀석의 몸집도 부풀렸다
그시절 스트라이프 셋업이 잘 어울렸던 녀석의 몸은 불가사의한 역사가 돼버렸다
한껏 튀어나온 배와 얼굴과 쇄골의 경계를 지운 넉넉한 턱살은
왠지 성인용품 사장님의 상징 같았다
너 몸 좀 챙기라고 또 못참고 쓴소리를 던지자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올해는 담배도 끊고 살도 빼겠다고 S는 새해 계획을 밝혔다
S가 26살 때 유전이 확실한 지병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맞은 친구 아버지의 죽음에 내가 할 건 같이 담배를 태우는 것 뿐이었다
늙은 나이에 맞은 친구의 위기에 내가 같이 할 수 있는 건 이제 담배도 아니었다
나는 담배도 안 하고 꾸준히 운동을 하고 아직 트렌치코트 핏이 사는 몸매다
그래서 S는 얼마 전 내 부름을 거절했다
선배 몇 명과 모이는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서 하하호호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다고 이유를 밝혔다
모두 기업 임원이거나 부자인 선배였다
그 이유를 듣고서야 나는 S를 보러 S의 동네에 찾았다
언제나 내게 자신만만했던 S였기에 S의 실토가 당혹스러웠다
녀석이 불안해보이긴 처음이었다
우린 불혹의 나이를 지나 지천명의 나이를 향하는 중간에 서있다
삶은 철학의 순리대로 공평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녀석은 또래보다 불혹이 일렀고 지천명이 늦고 있을 뿐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S는 딜도 깎는 노인의 삶을 택했다
성욕이 3대 욕구라니, 하늘도 사람 아랫도리는 관제 못한다니
어쩌면 S는 순리대로 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간 살아온 인생동안 등한시 해온 물품들인데 어떻게 팔지 궁금했다
다행히 죽으란 법은 없다고 성인용품을 팔기 시작했다고 하니
하나 둘 주변에서 소위 전문가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연상을 주로 만나던 친구놈은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 추천하는 제품을 소개해줬다
반찬몰 회계와 소싱을 맡던 여직원들은 좀 더 섹시한 란제리를 소싱해왔다
리스로 지내온 친구부부는 결제는 남자가 하더라도 선택은 여자가 할 거라며 여자의 취향을 찾으라 권했다
그렇게 데이터들이 모여 제법 영업이 된다고 한다
'엄마손'을 슬로건으로 반찬을 팔아왔다가
'빌린손'을 주력으로 쾌락을 팔기 시작했다
타인의 쾌락을 팔면서 S는 정작 슬픔으로 침잠한다
길이 보여 팔게 됐지만 이 길이 마지막이란 생각에 온 몸을 던진다고 한다
삶은 개개인의 시간마다 열매가 다르다
S의 지난 가을은 그물코가 커서 좀 더 수확이 적었다
S의 오는 봄은 큰 그물코로 실속있는 큰 꽃만 틔울 수도 있다
눈과 비가 오묘히 섞여 내리던 지난 주말에
금요일과 토요일의 경계에서
자신감과 용기 사이에서 비틀대는
초로의 중년의 무거운 날숨은 차가운 겨울밤에 하얗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