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내 혼란함을 식혔던 그 시원한 생수
(어느 신문에 올라온 광고. 이 광고를 모티브로 내 지난 경험을 되짚었습니다. )
내가 대학 다닐 때는 학생운동이 끝물이었다
지금도 명언이지만 주식이든 코인이든 끝물에 타는 건 아니다
나는 바보처럼 학생운동 끝물에 올라탔었다
술을 잘 사주던 선배들따라 술 먹고 다닌 업보였다
1학년 1학기에 F학점은 운동가의 훈장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1학기는 학고로 끝났고 나는 방학에 뭘 해야할지 고민됐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선배들은 이미 내 스케줄을 정해놨었다
나는 '전두환과 김우중 구속'을 외치며 그 여름 내내 팔도를 쏘다녔다
사나흘을 경상도를 돌다 창원으로 갔다
생전 처음 가본 창원이었다
창원, 마산은 뉴스에서만 봤었고 티비 그림에는 대부분 바다와 배로 이뤄졌었다
그런데 내가 간 창원은 시내 한복판이었다
잘 정비된 시내의 큰 인도에 200여명이 앉았다
마이크는 없었고 우리는 드러누워 노래를 불렀다
이윽고 창원과 마산 대학생들이 합쳐져 세를 불렸고 시민들은 멈춰섰다
경상도 땅에서 신한국당 욕하면 돌 맞는다는 말을 들고 자라온 터라 겁이 났었다
모여든 시민들은 무슨 일인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봤고 우리는 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더웠다
목은 말라갔다
보통 이런 기습시위는 10분내 철수한다. 아니면 잡히니까.
목이 갈라져가는데 앞에서 어느 여자가 물을 나눠줬다
큰 페트병 물을 한 봉지 가득 사와서 앞줄부터 나눠주고 있었다
그녀는 팔짱낀 시민들 속을 헤치고 두 번이다 더 물을 사 날랐다
하얀색 바지를 입었고 그 바지보다 하얗게 메이크업을 했었다
우리 일행은 아니었던 것 같고 시내에 일이 있어 나왔다가 물을 사주는 것 같았다
내게도 물을 줬다 "같이 나눠드세요"
서울에도 경상도 사투리는 들렸지만 창원에서 듣는 사투리는 더 오리지널 느낌이었다
시크한 향이 났다
일주일 넘게 시커먼 데모꾼 200명과 보냈기에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은 더 강렬했다
여자 향수를 잘 모르기에 그게 무슨 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압구정 여자에게서나 날 것 같은 향이라 생각했다
목을 축이고 그녀를 더 봤으나 그녀는 시민들과 같이 서있다가 곧 사라졌다
시민들 뒤에서 전경들이 튀어나왔고 우리는 절반이 연행됐다
일주일 후 서울의 모처에서 큰 데모가 있었다
전국에서 모이는 판이었다
그날도 무척 더웠고 서로의 땀냄새에 불쾌지수가 오르는 날이었다
우리는 교문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광장에 모여있었다
교문에는 경찰이 시꺼멓게 깔렸고 언제든 최루탄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위에 땀에 최루탄까지 터질 걸 생각하니 아찔했다
어린 남학생들은 징집됐다. 교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갈수록 전두환이 구속돼야 하는 이유는 옅어졌다
내가 빨리 학교를 나가야 하는 이유가 커졌다
너무 더웠고, 모든 게 불편했고 부모님이 보고싶었다
본 대열을 빠져나와 교문을 지켜야 하는 대열로 이동했다
수십개의 깃발이 작게나마 햇빛을 가렸다
대구, 부산, 창원...
다시 지난 창원 시내 바닥과 시원했던 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향이 느껴졌다
그녀도 여기에 온 건가?
밀리듯 부산, 창원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그들 사이를 뒤져봤다
이동하는 대열이 많으니 흙먼지가 일었다
사람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먼지는 냄새까지 지웠다
그녀의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착각인가?
그럴 수 있다
누가 데모 오는데 향수를 뿌리고 올려고...
그래도 그 향은 내 후각세포에 강하게 잔존했다
교문으로 가는 길에도 계속 그 향이 느껴졌다
시커먼 전경과 맞대고 서로를 으르렁 거릴 때도 그 향을 잊지 못했다
그 학교에 3일을 있었던가?
다시 그 향을 맡거나 그녀를 보거나 하지는 못했다
난 그 학교를 나오고 2학기에는 친했던 선배들과 멀어졌다
시크한 향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압구정 여자들 향 같은 그 향이 좋았다
먼지 냄새, 땀 냄새는 싫었다. 최루탄 냄새는 더더욱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