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쌤' 시리즈 완결
'선섹후사'가 MZ의 트렌드라고 하지
그럼 중년에게 '선키후사'는 더 자연스러운 게 아닐쏘냐!
아니었다
나의 키스는 그의 사랑을 부르지 못했다
비가 많이 오던 날
누구의 침범도 허락하지 않을 장대비 속 밤에
둘만 있던 그 술집에서
싱글 남녀가
술도 걸쳤기에
조명이 부채질하니
그의 미소가 고양이 꼬리 같았으니까
나의 선키스는 정당했다
'이 나이에 여자가 먼저 키스하면 안 되냐!'
얼마나 외쳤는지 모를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아우성은 벽 같은 징쌤에게 메아리 쳐 오지 못했다
'징~' 소리 잘 낼 것 같은 징쌤인데
왜 내게 아무런 말을 안 해주는 걸까?
그날의 달콤했던(적어도 내게는 ㅠㅠ) 키스 후에도 우린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나는 예의 서울여자 코스프레라도 하듯 새초롬하게 행동했다
요가원에 들어서면 목만 깔딱거린 채 징쌤에게 평소보다 눈길을 주려하지 않았다
나의 어설픈 연기를 다 안다는 듯 그 또한 변함 없었다
며칠 속앓이를 했더니 복어와 가자미가 역시나 눈치를 챘다
복 "이상해."
가 "그치? 너 무슨 일 있어."
-아무 일 없어. 생리증후군이야
가 "너 우리랑 주기 같아."
가자미의 눈이 더 찢어진다
-갱년기인가보지
복 "아냐, 너 사춘기 같아."
복어의 볼이 더 부풀었다
-아무 일 없어. 똑같아
복 "술을 멕여야 토해내려나?"
가 "쌤에게 물어볼까?"
역시 가자미다. 보통 눈치가 아니다
-내 일을 왜 쌤에게 물어? 이상한 애야
복 "흥분하네. 그럼 맞네. 징쌤이랑 뭐가 있네."
역시 복어다. 생긴 것처럼 능구렁이다
-저녁에 술 먹자
징쌤에게 둘이 달려들까봐 우선 물러섰다
동명항 10호 횟집에 모였다
징쌤을 닮은 고등어가 회쳐져 나왔다
(심각하다. 뭘봐도 징쌤이라니...)
털어놓을 각오를 하고 나갔지만 징쌤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에게 키스를 했다는 것도 말하기 싫었다
말하면 죽고 싶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복어와 가자미는 노련했다
이럴 땐 물만 바뀌어도 배를 뒤집고 죽음을 택하는 고등어(아씨, 또...)의 예민함을 보인다
초반엔 오은영처럼 내 심리를 좇더니
중반엔 이근안처럼 술과 약점으로 날 고문하다가
마지막엔 셜록처럼 완벽한 추리로 날 범죄자로 만들었다
그렇다
복어와 가자미가 짝이 있지만
아직 징쌤은 그들에게도 요가원의 차은우이자, 속초의 조인성이며, 우리 세대의 김창옥이었다
그러하기에 나는
오은영 빙의한 수지(몸뚱아리는 닮았다)의 노려보는 눈초리에 그날밤 지잉빠에 간 것을 불었고
이근안 빙의한 리나(야비함이 닮았다)에 단 둘이 술 먹은 걸 불었다
가자미가 물었다 "스킨십 했어?"
복어가 물었다 "잤지?"
놀라 자빠질 뻔했다
"자지는 않았지!"
복 "그치~ 그람 안되지"
복어가 검지를 들어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복 "그럼 어디까지 했어?"
가 "자는 거 전에는 키스, 포옹... 얼굴을 어루만지나? 손가락을 핥나?"
복 "너는 손가락 핥냐?"
가 "난 안 하지. 그럼 허벅지에 손을 올리나?"
복 "난 다른 데 손 올리지."
-그만해라... 그런 거 아니다
그렇게 나는 다 불었다
내가 먼저 키스한 것까지 다 불었다
걔네들이 넘겨짚는 게 싫었고
걔네들이 추측하는 스킨십이 우리 관계를 저속하게 만드는 것 같아 싫었다
나와 징쌤은 순수했고, 그는 더더욱 결백했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먼저 선빵친 내가 문제였으니까
"너 그거 키스 아니야. 뽀뽀야"
스킨십 전문가 복어의 단언이었다
-뭐가 다른데?
가 "키스와 뽀뽀가 뭐가 다른지 모르는 애는 뽀뽀가 최선이었을 거다"
-입을 맞췄어
복 "이 한심아.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지. 니가 유치원생이야?"
가 "요새 유치원생들도 혀로 키스한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복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여튼 넌 뽀뽀야."
-아니야!
난 고집을 부렸다
뽀뽀는 유치해 보인다
키스가 로맨틱하다
키스는 뭔가 사랑의 무대에 올려진 이들의 합창 같다
뽀뽀는...... 골목길에서 개구쟁이들이 놀다간 후 남겨진 소문 같다
스킨십 전문가 복어가 말했다
"키스는 그의 마음이 더해지는 거지. 징쌤이 너한테 고백했어? 너 좋대? 키스는 혀가 막 왔다갔다 해. 서로 소통하는 거라고. 너 소통했어?"
할 말이 없었다
가 "얘가 혼자 박았대잖아."
왜 내 행위는 심리적으로 평가 받지 못하고 물리적으로 평가 받을까?
내가 그에게 1m/s의 속도로 박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수개월 동안 그에게 다가간 건데!
악이 받혔다
이래서 소주가 위험하다
이래서 동해바닷바람이 위험하다
"키스였여! 키스라구! 징쌤도 날 조금은 좋아할 거라고!"
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이렇게 서서 팔을 올릴 때 내 앞에서 자세를 봐주는데 손과 다리가 아닌 내 눈을 봤다고."
흥분했다
"내가 가부좌 틀 때 내 다리를 두 손으로 지긋이 눌러주는데 부드럽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고. 그런 숨은 사심에서 나오는 거라고!"
수지의 복어 같은 볼이 홀쭉해졌다
리나의 가자미 같은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요가동작을 하나 더 하려다 체념하고 소주잔을 비웠다
수지와 리나도 잔을 비웠다
잔을 채우려고 소주병을 드니까 복어가 내 손을 잡았다
복 "지잉에 가자."
싫다고,
니들이 지잉빠에 가면 난 저 방파제에서 뛰어내릴 거라고
악으로 버텼으나
나는 수지와 리나를 졸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우려와 다르게 복어와 가자미는 지나가다 들른 애들 같았다 얌전히 술을 마셨다는 말이다
기대와 다르게 징쌤은 뜨내기 손님 맞은 주인 같았다
나를 특별히 대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각오와 다르게 나는 진상이었다
말도 안 하고 자작만 해댔다
열 번째 잔쯤 꺾을 때 수지가 내 잔을 잡았다
"왜 그렇게 마셔대~"
눈이 번쩍 뜨였다
징쌤이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또 슬퍼졌다
보지 말았어야 할 고등어 눈이다
심해에서 막 올라와 바다에 비친 달을 본 눈알이랄까?
차라리 썩은 동태눈이었다면 마음을 접었을 건데 그는 왜 달이 비치는 눈알인가!
수지가 나섰다
"쌤~ 쌤은 연애 안 해요?"
야속한 쌤은 웃고만 만다
가자미가 거든다
"쌤 정도면 대시도 많을 거 같은데~"
쌤이 달빛 가득한 눈으로 답한다
"제가 뭐라고 관심을 받나요. 너무 절 좋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쌤의 웃는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재수없다
'그럼 난 뭐가 되냐, 이 길냥이가 씹다 버린 고등어 대가리야!'
다시 소리 없는 아우성이 내 복창을 두드렸다
하지만 난 현명하게 굴었다. 바보가 아니니까
술잔을 꺾거나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난 쌤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가자미의 옆머리를 정돈해주었다
가자미 귓볼 아래 목살이 삐죽삐죽 솟아났고 땀이 배어났다
우리는 소득 없이 지잉빠를 나섰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은 많이 마셨지만 잠을 잘 수 없었다
그가 미웠지만 밉지가 않았다
좋아하면 안 되지만 그리워서 아팠다
며칠 요가를 쨀까 생각해봤는데 그러면 더 우스워질 것 같았다
이럴 때일 수록 더 평소처럼 행동해야 서울여자 같다
난 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진짜 아프게 됐다
그날의 야행에 감기몸살이 걸렸다
어쩔 수 없이 며칠 요가원을 못 나갔다
친절한 수지가 쌤에게 내가 아파서 못 나온다고 전했다
오뉴월 감기는 독감처럼 앓는 법이니 이참에 한 주 쉬면서
그 사이 마음을 정리하면 됐다
혼자 동하고 혼자 정리하는 게 웃겼지만 더 우스운 꼴을 보기 전에 정리하는 게 맞다
그러나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됐더라면 진작 나는 조인성하고 살았겠지
징쌤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감기에 좋은 요리가 있는데 오늘 가게에 나오실 수 있을까요?"
'병 주고 약 주고'가 이런 건가?
자존심이 상했다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이 되자 여름의 여자답게 나는 센치해졌다
가슴이 말하고 있었다
'그럼요, 가야죠'
감기 걸린 환자라 꾸미는 게 어색했지만 그에게 못난 얼굴 보이는 게 더 싫었다
티나지 않게 메이크업을 하고 갔다
아파보여야 하니 볼터치도 했다
더우니까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고
감기 걸렸으니까 목에 작은 스카프를 묶었다
파란 땡땡이는 너무 포카리스러우니 잘잘한 꽃무늬가 프린트된 스카프를 골랐다
덥지만 노출은 남녀칠세부동석주의자에게 당치도 않으니 7부 팔길이 단가라 티셔츠를 입었다
파란색 스트라이프 무늬인데 보트넥이라 자신 있는 쇄골이 드러났다
이 티셔츠에는 평소 하얀색 치마를 입지만 너무 차려입은 티가 나서 하얀색 반바지를 입었다
허벅지 중간 길이라 적당한 노출이었는데 감기다이어트 덕에 허벅지가 간고등어처럼 제법 섹시했다
그렇다 나는 마음이 갈팡질팡 엉망이었다
거울 앞에 섰다
후훗
나란 여자...... 믓찌다!
지잉빠에 도착했다
이...잉?
문은 닫혀있고 하얀 종이에 "오늘 장사 안 합니다"라고 써있네?
이잉?
이 인간이 뭐하자는 거지?
아픈 사람 불러놓고!
앉지도 못하는 사람을 오게 해놓고,
아파서 팔도 못 드는 여자를 화장하게 해놓고,
오뉴월 더위에 스카프 매게 해놓고,
나이에 안 어울리는 단가라에 흰 반바지 입혀놓고,
밀가루 반죽칠에 핑크 립스틱 바르게 해놓고,
문을 잠궈?
승질을 못이겨 문을 발로 찼다
덜커덕
문이 열렸다
장사는 안 해도 문을 잠궈놓진 않았나보다
열린 틈으로 보니 주방에 불이 켜져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징쌤이 고래처럼 크게 나타났다
나란 여자...... 왜 이러냐
"오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손님 안 받았어요. 잠시 앉아 계세요. 곧 음식 내올게요."
도망가고 싶었지만 앉았다
"전에 잘 드셔서 돈지루하고
보양하시라고 장어덮밥,
그리고 이건 생일이시니 미역국."
이...잉? 내 생일을 알어?
"저희 회원카드에 생년월일 쓰잖아요. 우연히 봤어요."
-고맙습니다. 저도 잊고 있었는데...
"우리 나이 땐 다들 생일 잊죠."
-선생님
"네."
-미역국은 고맙습니다만, 저 선생님하고 꽤 나이 차이 나요
"아! 죄송합니다. 마흔 넘으면 다 친구 같아서 ^^"
이 남자가 웃는다
저런 웃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웃는다
이 남자가 친절하다
저런 배려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친절하다
이 남자 이러면 안 되는데,
내게 자꾸 다가오면 안 되는데,
나는 밀어내는데,
너는 왜 오는지,
달과 지구의 인력이 이 따위 놀음인지
바다와 해안의 밀땅에 파도도 이렇게 슬픈지 궁금해졌다
술이 땡겼지만 아프다고 밥해주는 쌤에게 술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제가 왜 속초에 왔는지 아세요?"
속초에 오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늘었고 오는 이유도 다양하다
'저를 만나러 오셨나요?'
소리 없는 미친 소리를 겨우 삼켰다
"아내와 마지막 여행한 곳이 속초예요
암으로 6개월을 힘들게 버티다 갔어요
제가 일이 바빠 아내를 잘 챙기질 못했어요
시한부 판정 받고는 회사를 바로 그만두고 간병했죠
나아질 거란 희망은 없었지만 하루라도 웃으며 지낼 수 있다면 다행이다 생각했죠
5개월이 지났을 때쯤 여행이 가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속초를 가고 싶대요
아프기 몇년 전 여름과 겨울 두 번 속초를 왔었는데
여름 바다가 너무 푸르고 햇볕도 쨍쨍해 우리가 지나온 날 같다고 했어요
저는 일만 하던 사람이라 그 말을 듣고는 우리가 이렇게 행복했나 싶었죠
겨울에 왔을 땐 눈오고 추운 날이었는데 신기하게 모래톱에 닿는 파도가 얼었더라구요
바다가 바다 같지가 않고 저 멀리 섬까지 닿은 길처럼 보였어요
아내는 속초에서 자신의 과거와 미래 모두를 봤대요
여름의 속초처럼 아름답게 남은 가족이 행복할 것 같고
얼어붙은 바다 속 섬에 죽은 후 자기가 있어 언제든 우리와 닿을 것 같았답니다
저는 여기에 아내가 있다고 느껴져요."
징쌤은 이야기를 마치고 따뜻한 사케와 볶은땅콩을 건넸다
나는 울고 있었다
언 파도에 손을 댔다 붙어버린 기억이 떠올라
그 섬에 가겠다며 헤엄치다 숨이 멎었던 아이가 떠올라
눈부시게 파란 여름을 추억하며 병마와 싸웠을 그녀가 떠올라
한껏 차려입고 좋아하던 좀전의 내가 징쌤의 어두운 얼굴 위로 떠올라
나는 울었다
울면 어려진다
나는 눈물을 꿀꺽 먹으면서 내뱉었다
"그럼 요가원하면 안 되는 거였잖아요
막 여자 허리에 손 닿고
막 툭튀 보여주고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술집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술로 사람 말랑하게 해놓고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나는 다시 아이처럼 울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사케에서 아직 김이 나고 있었다
왜 모질지 못하고 내게 사케를 주는지
왜 마지막까지 그는 사케처럼 따뜻한지
나는 왜 집에 갈 때까지 사케와 땅콩을 생각했는지
전봇대 위에 까마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요가원을 나가지 않았다
물론 지잉빠도 가지 않았다
수지와 리나도 곧 그만뒀다
수지는 복어 남친 포장마차를 돕느라 바빠졌고
리나는 가자미 남친과 수영을 배우기로 했다며 요가복을 당근했다
몇 달 후 요가원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지잉빠도 문 닫았다고 했다
용기가 안 생겨 소문이 잦아들 때쯤 지잉빠에 갔다
문은 닫혀 있었고 안은 어두웠다
징쌤은 보이지 않고 그의 흔적마저 낡아있었다
검은 창이 나를 비췄다
겨울바다 같은 여자였다
립스틱을 꺼내 창을 거울삼아 입술에 색을 입혔다
그때 내 키보다 한뼘 높은 곳에 붙은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지잉戢影 : 그림자를 감추다]
그는 정말 사라졌다
메모지를 들춰봤다
영화를 보면 호기심 많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메시지가 숨겨있던데 현실은 달랐다
그의 글자에 손을 대봤다
사케처럼 따뜻할 줄 알았지만 겨울바람에 식은 유리는 손을 떨리게 했다
립스틱으로 유리에 답장을 썼다
[어디서든 조린 무처럼 안온하시길]
겨우내 나는 멈춰있었다
인생이 미완성으로 남을 것 같았다
봄이 되니 깨어났다
한 시절의 이 빠진 조각이 내 생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봄을 보내니 살 것 같았다
빠진 조각을 찾지 않아도 생은 완성될 것 같았다
바람은 이뤄지면 허무를 남긴다
늙으면 허무만큼 아픈 게 없다
설악산이 초록으로 쨍하게 빛날 때
춘천사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서로 못 본 지 몇년 돼 놀러오라고 성화였다
"여기 네가 좋아할만한 술집이 있어
주인이 얼굴을 안 보여줘
말도 안 해"
-내가 벙어리 좋아한다고 했니?
"그게 아니야
소문으로는 조쉬하트넷이야
근데 아무도 실제 본 사람이 없어
안주가 기가 막혀
생소한 일식으로 요리하는데 뭐랄까... 첫사랑이 해주는 맛이랄까?"
-그 가게 이름이 뭔데?
"그림자"
전화를 끊고 폰에서 지도를 열었다
친구집을 찾아 근처를 로드뷰로 뒤졌다
한참 뒤져보니 찾을 수 있었다
간판에 글씨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이름마저 그림자로 숨겨버렸다
일식, 얼굴 없는 주인, 그림자... 그다. 그일 수밖에 없다
친구 말처럼 주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건네도 얼굴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세상과 벽을 쌓기라도 한 듯 주문용 작은 창만 있고 빠와 주방이 큰벽으로 막혀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를 확인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준 메뉴를 시켰다
메뉴에 사케가 없어 소주 한 병과 땅콩을 시켰다
옆에 손님들이 땅콩이 처음 나온 안주라고 했다
소주가 달았다
얼굴을 감추고 입을 닫은 그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다 먹고 계산을 위해 카드를 창으로 들였다
카드에 써진 내 이름을 봤을테다
그럼에도 그는 카드만 돌려줬다
얕은 숨을 남기고 돌아섰다
다음주에 또 갔지만 역시나 말을 듣지 못했다
더 가는 게 맞나 싶었지만 그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늘을 뚫을 듯한 비가 내리던 날에 다시 찾아갔다
가게는 우리의 마지막 그날처럼 비어있었다
그날은 나를 위해 그가 비웠지만
이날은 우리를 위해 하늘이 비워준 듯 했다
그가 내게 해줬던 돈지루를 주문했다
돈지루를 보니 그가 맞았다
당근, 무, 감자의 테두리가 깎인 건 그의 손길이었다
내가 왔는데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듣는 이가 아무도 없는데 그는 말이 없었다
술을 힘겹게 다 마시고 일어났다
더 오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지막이니 인사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똑똑.
"고마워요. 내 생일에 이걸 해줬죠. 오늘따라 오는 길이 쌀쌀했는데 가는 길은 따뜻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행복하시구요."
처음 땅콩을 시켰을 때 그녀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낸 적이 없던 안주를 오던 손님이 시킬리가 없다
그녀가 다시 와 또 땅콩을 시켰어도 나는 아는체할 수 없었다
세 번째 그녀가 왔을 때 나는 입을 열뻔 했다
그녀의 숨소리가 버겁게 들렸으니까
그녀는 답을 바라지 않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나는 그때 그녀가 더 먹을까 싶어 조린 무를 튀기고 있었다
그녀에게 조린 무를 줬더라면 좋았을 거라 후회했지만
그것마저 줬더라면 그녀는 울었을 것 같다
며칠 후 가게 문을 닫았다
떠나고 싶어졌다
속초에서 떠나올 땐 그녀에게 미안해서 떠났다
춘천에서 떠날 땐 다시 올 생각으로 나섰다
다시 와서 이 자리를 지켜야 그녀의 배려에 대한 보답일테니까
마음이 속초시절보다 편해졌다
아내는 그 섬에서 한계령을 넘지 못했다
나는 비로소 안온하게 살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