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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채운 Aug 14. 2024

12층의 레몬나무

12층의 레몬나무

                         -꽃채운-


레몬을 잘라 요리에 쓰려다 문득

버려지는 씨앗들이 안쓰러웠다. 

씨앗 하나하나에 모두 나무의 삶이 있을 텐데.

온전한 레몬 씨앗 세 개를 골라 겉껍질을 벗겨냈다. 

물 묻힌 솜에 감싸 일주일을 햇빛 아래 놔뒀다. 

세 씨앗 모두 싹을 틔운다. 


여름의 뜨거운 사랑을 먹고 레몬 싹들은 자라났다.

갑작스레 불어닥친 선선한 가을바람에 둘이 쓰러졌다. 

처음 싹을 틔울 때부터 가장 굵던 아기 나무 하나만이 

살아남아 뿌리를 내린다.


12층의 레몬나무는 그 후로도 겨울만 되면 아팠다. 

잎이 후드득 떨어져서. 나는 나무가 잘못될까 봐 겁이 났다.

추운 바람맞지 말라고 비닐에 싸 메어 근처 꽃집에 데려갔다.

다음 여름이 오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 했다.


그래서 늦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바람이 제법 차질 때면 

베란다에서 집 안 가장 따듯한 곳에 레몬나무를 옮겨 놓는다.


사람들이 더운 여름날을 이겨내려 보양식을 먹듯

나무도 추운 겨울날을 이겨내라고 영양제를 놔준다.


어느덧 여섯 번의 겨울을 넘긴 레몬 나무는 풀잎 같던 줄기가 제법 나무다워졌다.

내년 봄에는 분갈이를 해 줄 생각이다. 더 많은 뿌리를 내리면 더 건강히 자라겠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레몬을 물에 띄워 마시려고 레몬을 자르던 중이었다. 레몬을 썰고 나니 버려지는 씨앗들이 눈에 밟혔다. 칼날에 레몬과 같이 잘린 씨앗들을 빼내고 온전한 모양의 레몬 씨들을 골랐다. 연노랑의 겉껍질을 까면 갈색의 매끈한 씨앗이 나온다. 그 씨앗들을 물에 흥건히 젖은 솜에 잘 감싸서 지퍼백에 넣었다. 일주일을 베란다 햇빛 아래 두었다. 여름의 햇살을 먹고 씨앗들은 싹을 틔웠다. 


씨앗의 싹부터 내 손으로 키워서일까, 베란다의 수많은 화분 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많이 가는 나무다. 바람이 차졌다고 느낀 날이었다. 바쁜 날들에 며칠 잊고 지냈던 레몬 나무가 생각 나 화들짝 놀랐다. 역시나 레몬 나무의 잎들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쿵 떨어졌다. 레몬 나무가 아파 죽을까 봐 겁도 났다. 찬 바람맞지 말라고 비닐을 꼼꼼히 씌워 근처의 꽃집에 가져갔다. 사장님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없고 다음 여름까지 잘 돌봐주라고만 하셨다. 누군가는 화분 하나 가지고 유난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집에 두는 인테리어 화분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생명이라 생각해서 그렇다. 


여름이 끝나간다. 아직은 햇살이 뜨겁고 해도 길다. 조금 더 선선해지면 집 안에 화분을 들여놓을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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