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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채운 Aug 14. 2024

풀잎으로 사는 일

풀잎으로 사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이다.

풀잎으로 사는 일

                            -꽃채운-


풀잎은 커다란 나무를 동경했다.

굵은 빗방울에도 단단히 선 모습을 동경했고

그늘을 만들어주던 넓은 나무의 품을 동경했다.


요란한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하늘이 부서지듯 천둥이 치고 눈이 새하얀 번개가 쳤다.

모든 것을 쓸어갈 듯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풀잎은 바로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인다.

혹여 몸이 상할까 허리를 더욱 굽히고

혹여 뽑힐까 뿌리를 잔뜩 움켜쥔다.

풀잎은 태산 같던 나무를 떠올렸다.

이런 재앙쯤 코웃음 칠 것 같은 나무가 부러웠다.


비가 멎어간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해가 떠오르며 번개도 천둥도 모습을 감춘다.

그제야 밤새 엎드려있던 풀잎이 허리를 편다. 

풀잎만이 무사히 밤을 넘겼다.


풀잎은 보았다. 

그 태산 같던 거대한 나무가 기둥이 꺾여 뒤로 넘어간 것을.

그 처참한 모습을 목격한 풀잎이 생각한다. 

단단한 나무가 아니라 부드러운 풀잎이어서 다행이었다고.

풀잎으로 사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풀잎인 내가 커다란 나무를 바라지 않았나 하고. 


풀잎인 나는 그저 부드러운 바람 한 점, 따듯한 햇살 한 줌이면 만족하고 살 텐데.

커다란 과실을 맺고 누군가에게 큰 품을 내어줄 수 있는 나무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바람결에 살랑이며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사는 것도 행복할 테다. 

폭풍 같은 재앙이 온다면 잠시 몸을 낮춰 엎드렸다가 해가 뜨면 다시 살랑이고. 

꼭 대쪽 같은 나무가 되는 것이 정답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많은 것을 가진 나무가 되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


풀잎으로 사는 일도 나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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