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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Mar 15. 2019

이촌동 한강철교: 멈추고 부서지는 밤

한강은 가까이서 보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특히 밤의 한강은 코 앞에서 바라봐도 너무나 검고 매끄러워서, 흐르는 물이 아니라 요동치는 기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검은 평면에 빛이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앞에 흐르는 물결은 점점 더 단단한 물성으로 변해간다.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면 움직이는 것인지 멈춰 있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있다.


이런 이유로 한때 밤 한강 구경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다. 그 때는 첫 직장 입사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어쩌다 강물 구경에 정신이 팔렸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음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면 한밤에 강가에 가서 새벽이 올 때까지 서너 시간씩 앉아있었다.


나는 이촌동에 닿는 한강철교 아래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했다. 가로등이 새파란 흰색이 아니라 가스등 같은 주홍빛이어서 좋았다. 그리고 앉으면 손을 뻗어 물을 적실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가까운 것도 상당한 장점이었고, 용산역에서 심야영화를 보고 슬슬 걸어가기에 좋은 위치이기도 했다. 한강철교가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웅크리면 신발코 앞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검은 물결이 넘실거렸다. 그러면 그 검은 표면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눈 앞의 한강은 소리 없이 미끄러지는데, 강의 이편에서 혹은 강의 저편에서 어딘가로 향하는 차량의 엔진음이 멀리서 들리는 파도소리처럼 밀려왔다. 그렇게 있다 보면 물결이 정지하는 순간이 있었다. 흐르다 말기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물결뿐이 아니라, 그곳에 앉아있다 보면 시간도 그렇게 멈췄다 흐르기를 반복했다. 아마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추위 때문에 제대로 된 시간 감각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손발의 감각이 없어지는 추위였는데도 불구하고, 쉽사리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자리를 뜬다는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물결의 주박에 걸린 것처럼 나는 한 번 앉으면 그 자리에 못 박혔다. 물결도 시간도 이상하게 흐르는 순간에 갇힌 것처럼. 


그렇게 앉아있다 보면 갑자기 알람처럼 철교가 울었다. 머리 위에서 철판을 대고 두드리는 것 같은 첫 열차 지나는 소리가 나면 나는 화들짝 물결로부터 깨어나곤 했다. 반사적으로 철교를 보다가 눈을 감고 들으면 소리가 질량을 가지고 몸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몸을 다 두드리고 지나가면, 주변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있었다. 한 밤이 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 어리둥절하게 집에 가서 이불 속에서 몸을 녹였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나는 또 그곳에 갔다. 한강 다리에서는 늘 첫차 소리마다 밤이 부서졌다. 


이런 기벽은 한달을 조금 넘기고 끝을 맺었다. 어느 날 문득 강을 찾았던 것처럼 어느 새 나는 강을 찾지 않게 되었다. 내가 그 때 왜 그랬는지를 몇 번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마땅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다만 얼어붙은 시간을 산산조각내던 열차 소리가 이따금씩 귓 속에서 울리는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것들은 자취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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