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이의 자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상주라는 이름 아래, 나는 관을 고르고 수의를 정했다. 아버지를 어디에 모실지 결정하는 일도 내 몫이었다. 묻는 이도 없고 시키는 이도 없었지만, 나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동생들은 조문객을 맞고 음식을 나르느라 분주했지만, 끝내 중요한 결정은 모두 내게 돌아왔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맏이가 되었다. 언니라는 자리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운명이었다. “너는 언니니까.” “네가 맏이니까.” 어린 시절 수도 없이 들어야 했던 말이다. 그 말은 칭찬도 위로도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먼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었고, 동생들보다 앞서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좋아서 하는 일도 있었지만,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고 싶어도, 나는 늘 아기를 업고 있어야 했다. 밭일 나간 부모 대신 동생을 돌봐야 했으니, 자유로운 아이로 살 수는 없었다. 동네에서 뛰노는 또래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봐야만 했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막내가 밭에 일하러 가는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울며 떼를 썼다.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아이였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막내를 보는 엄마의 눈빛은 애틋했고, 그 시선은 나를 더 외롭게 했다. 가족 속에 있었지만, 늘 혼자인 아이처럼. 동생을 달래며 울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 진심은 애틋한 엄마의 시선에서 동생을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달래도 울음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눈을 흘기며 동생의 팔을 꼬집었다. 내 질투심이 향한 곳은 사실 동생이 아니라, 막내만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었다.
자매들은 자라면서 일본, 미국, 제주 대구 등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다고 해서 맏이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아프거나 수술을 하게 되면, 도움이 필요한 일은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쓰러지셨을 때도 그랬다. 수술을 받고 회복했지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한동안 내가 결혼해서 살던 반지하 월세방에서 지내셨다. 작은 집에 아이 넷과 부모님까지 여덟 식구가 북적이게 되었다. 숨 쉴 틈조차 없었지만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닥친 일이었고, 맏이가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식사 때마다 아버지께 죽을 떠먹여 드리고, 며칠만 지나도 비듬이 허옇게 올라오는 머리를 감겨드렸다. 밤중에는 몇 번이나 일어나 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대소변을 직접 받아내는 건 아니었지만, 그 어떤 일도 쉬은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요양병원과 집을 오가다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건 여섯 자매 중 나 혼자였다.
새벽녘, 아버지의 호흡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이제 마지막 호흡이다.” 그 말이 끝나자, 방안은 정적에 잠겼다. 아, 인간의 마지막이란 이렇게 오는구나.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난 아버지의 얼굴은 잠든 듯 평온했다. 내 마음속에도 두려움보다는 고요가 찾아들었다.
너는 언니니까, 네가 맏이니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맏이라는 이름은 늘 나를 규정해 왔다. 때로는 부담스럽고 서글펐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것은 내 삶의 토대였기 때문이다.
맏이의 자리는 내게 짐처럼 주어졌지만, 그 무게 속에서 나는 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누군가는 나를 의지했고, 나는 그 의지를 감당하며 단단해졌다. 그것은 나의 상처이자, 동시에 내 서사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