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뭐야 넌 왜 여전히 못 생겼냐"
"뭐래. 중생대 양서류같이 생긴 새끼가."
와인잔을 어지러이 부딪치며 서로가 서로에게 실없는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같은 과 동기들과 만난 오랜만의 자리였다. 패션센스만큼이나 개그 센스도 괴랄했던 지훈이는 한 패션회사의 MD가 되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기연이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시작했던 도자기 만들기가 이제는 삶이 되어 도예가가 되었다. 방학 때만 되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해외를 돌아다니던 나는 겨우 휴가 십여 일을 저당 잡힌 채 일 년을 꼼짝없이 버텨야만 하는 항공사의 인사팀 직원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우리 중 전공을 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 때는 그렇게 지겹게도 만나던 우리가 다 모인 것도 5년여 만이었다.
"마지막 모임이 언제였더라 재영이 결혼식이었나" 내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때는 지훈이가 안 왔지" 잘못된 정보를 참지 못하고 기연이가 답했다
"아냐 가긴 갔다니까? 그다음 주에 가서 그렇지" 웃기지 않냐는 표정으로 지훈이가 묻는다.
"새꺄, 넌 어쩜 이렇게 한결같냐 얼굴도 개그 센스도" 핀잔을 던지지만 입은 벌써 웃으면서 내가 말했다.
마지막 모임이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제도 만났던 사이처럼 어색함은 전혀 없다. 대학을 졸업한지도 수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정신연령은 처음 만났던 신입생 때나 지금이나 딱히 변함이 없다. 이제 어딜가도 적지 않은 나이가 됐지만 대학 새내기 시절과 다르지 않게 여전히 개드립과 상호비방이 아무렇지않게 날아다닌다.
우리의 대화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중없이 오간다. 집값이고 뭐고 내 월급만 빼고 다 올라서 죽겠다든지, 회사도 오래 못 다닐 것 같은데 기연이네 공방에 청소미화원 자리는 안 구하냐든지, 지훈이가 한여름밤 청년광장에서 야심 차게 촛불 이벤트까지 준비했지만 결국은 보기 좋게 차였던 얘기라든지, 그날 밤에 잔잔한 바람이 계속 불어서 기분은 좋긴 했는데 촛불이 계속 꺼지는 바람에 다시 불 붙이느라 내가 개고생 했던 얘기라든지 등등 그렇게 별별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기연이가 말을 꺼냈다.
"야 근데 지연이는 요새 어떻게 지내냐?"
그래, 지연이.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따뜻한 말을 건넬 줄 알았던 지연이. 사람들을 세심하게 챙기고 작은 것까지 배려했던 지연이. 지훈이가 청년광장에서 촛불 이벤트를 하게 만들었던 그 지연이. 나도 한 때는 가깝게 지냈었는데. 지연이는 요새 뭐하고 살지?
"벌써 대학원 졸업한지도 꽤 됐을걸?" 지훈이가 무심한척 답했다.
지연이는 몇 년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대학원을 갔다고 했다. 자기도 어디서 들은 거라 잘은 모르지만 그냥 시를 쓰기 위해서 대학원 갔다는 것 같더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요즘 세상에 시라니'라는 말이 나왔다.
"그래, 양철깡통 같은 너새끼가 어떻게 시를 알겠니. 너 국문학개론 재수강하고도 C+ 받지 않았냐? 형이 지금이라도 좀 알려줄까."
"아, 니들 또 쓸데없는 소리 하는 거 보니 갈 시간이다. 이제 그만 가자. 나 내일 아침에 수업 있어."
계산하고 톡으로 알려줘. 오늘 즐거웠는데 또 언제 보냐. 글쎄 누구 결혼식이나 아님 장례식에서 보지 않을까. 됐고 다음번엔 우리 집 근처에서 만나 나쁜 새끼야. 야야 택시 왔다 얼른 집에나 가라. 의례 모임의 마지막에 오고 갈 만한 뻔한 인사들과 함께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서로 손을 흔들었다.
한바탕 시끌벅적함이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까 모였던 와인바가 보인다. 통창이라 우리가 있었던 그 자리에 어지러이 널브러진 와인잔과 남겨진 와인 그리고 촛불이 보인다. 그래 촛불. 잔잔히 불어오는 기분 좋은 여름밤의 바람을 맞고 있자니 꺼지는 촛불을 따라다니며 계속 다시 불을 붙여야 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아, 나이 먹어서 그런가. 요즘 옛날 생각 많이 나네.
어디 보자. 지연이 번호가 아직 있긴 한가. 아, 있긴 하네. 번호 안 바뀌었을까. 아니 근데 연락 안 한 지가 언젠데 좀 오바아냐.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연결음 뒤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연이 목소리였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아직 번호 그대로구나. 그러엄 나도 잘 지냈지. 어어, 오늘 오랜만에 애들 봤거든. 아, 술? 와인만 조금.
한동안 나와 친구들의 요즘 사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 또 우리의 옛날 얘기가 다정하게 오고 갔다.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점점 더 취기가 올라왔다. 취기 때문인지, 따뜻하게 맞아준 지연이 때문인지 오늘은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다. 오늘같이 바람도 좋은 한여름밤이라면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얘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했다. 저어... 지현아 근데 있잖아.
"내가 옛날에 너 많이 좋아했어"
"... 알아"
아니 뭐야. 알았다고? 진짜로? 어떻게?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술이 확 깨네? 티가 그렇게 나는데 어떻게 모르냐고? 아닌데. 나 연기 진짜 잘했는데. 아무도 몰라 진짜 아무도.
"근데 그때 상황이 좀 그랬잖아" 지연이가 말했다
"그랬지..."
맞아. 나랑 제일 친한 지훈이가 널 좋아했으니까. 걔가 개그 센스는 좀 괴랄해도 나름 순정파거든. 촛불 이벤트 한 날, 너한테 차이고 지훈이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데. 그날 나도 걔 때문에 술 진짜 많이 마셨다. 지훈이한테 미안하긴 했는데. 한편으로 난 기분이 좋기도 했던 거 같아. 그렇다고 그때 내 마음을 너한테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그냥 언제가 한 번은 꼭 얘기하고 싶었어. 라는 긴 말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른 침과 함께 꾹 삼켰다.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술이 조금 깨고 나니 얼른 이 분위기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마무리 인사를 꺼냈다.
"어... 뭐... 그래 여튼 잘 지내면 다행이고. 나중에 언제 한번 보자."
"그래. 너도 잘 지내. 그리고 너네 집 주소 좀 알려줄래?"
"주소? 주소는 갑자기 왜?"
"뭐 좀 보내주려고."
폭탄만 빼고 아무거나 보내라는 내가 생각해도 뚝딱거리는 농담과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대화는 급하게 끝났다. 아, 내가 미쳤지. 여태 잘 묻어뒀던 걸 왜 굳이. 왜 하필 오늘. 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화를 했던 걸까. 뭘 보내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연이가 진짜로 폭탄을 보내도 이건 정말 할 말이 없다. 아니 그냥 지금 폭탄 먹고 죽고 싶다.
그리고 며칠 뒤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택배 상자 속에는 어떤 시집이 한 권 들어있었다. 그리고 책의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란 말이 있더라. 잘 살아.'
이 글은 오글오글(3주 차 주제 : 한 사진을 보고 드는 느낌을 글로 써보기)에서 함께 쓴 글입니다.
4주 차 주제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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