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이혼식을 올린다. 30년 전, 결혼했던 그 장소 그곳에서 내 결혼의 마침표를 찍는 이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나는 30년 전 그때 그 결혼식처럼, 식장 앞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아이고 상무님 바쁘신데 와주셨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김 팀장 이혼한다는데 내가 위로해주러 와야지! 아니, 축하해줘야 하나? 하하하"
"부러우시면 축하해주십시오 상무님 하하하"
어차피 상무도 나도 회사를 그만둔지는 몇 년 됐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부른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간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오고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간다. 아, 결혼식이나 이혼식이나 사람 맞는 일은 보통이 아니구나.
주변에 나의 이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자 사람들은 물었다. 그냥 알아서 이혼하지 뭘 굳이 이혼식까지 올리냐고. 그리고 조심스럽게 누군가 물어보기도 했다. 축의금도 해야 되냐고. 아니, 이혼은 슬픈 일이니까 축의금이 아니라 조의금이냐고. 일단, 축의든 조의든 마음만 받을 테니 굳이 안 하셔도 되고. 왜 내가 이혼식을 올리게 됐는지부터 얘기해보자. 결혼식은 성인(그것이 남녀든 남남이든 녀녀든 혹은 불특정 다수 간이건에)이 결혼(結婚)을 선언하는 예식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축하받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밝히는 데도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와 내 아내가 결혼을 알렸던 것처럼 이혼도 공식적으로 밝히고 싶었다. 내게 이혼이라는 건 부끄럽거나 창피한 일은 아니었다. 결혼이 인생을 살아가며 꼭 지나쳐야 하는 중간 관문 같은 것이 아니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큰 이벤트일 뿐인 것처럼, 이혼도 그냥 내 인생에 있을 수 있는 큰 이벤트일 뿐이었다. 무의미한 악수 세례를 벗어날 요량으로 딴 생각을 이어갈 때쯤 이혼 플래너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돌님(플래너는 예비 돌싱이라며 나를 그렇게 불렀다) 이제 본식 준비하실게요"
"아. 예.... 예"
이혼식의 식순은 결혼식의 반대로 진행된다. 부부가 함께 입장하고 서로의 결혼반지를 빼준 뒤, 각자 남이 되어 따로 퇴장한다. 그러니 결혼식의 백미인 신부 입장이나 꽃잎 흩날리는 결혼 행진 같은 건 없는 셈이다. 아, 물론 주례사도 준비되어있다. 기왕이면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셨던 분께서 이혼식 주례도 해주셨으면 그림이 이뻤으련만, 선생님은 본인의 주례빨이 약해 결국 이혼을 하는거라며 이혼주례는 극구 거부하셨다.
사회가 장내를 정리하고 오늘 식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부부 입장!"
결혼행진곡을 다시 들으며 아내와 입장한다. 30년 전만 해도 이 행진곡이 내게 이혼 행진곡이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당시엔 운명 같은 상대를 만나 운명 같은 사랑을 하고 운명같이 결혼에 골인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것은 그저 커다란 우연일 뿐이었다.
지금은 100세 시대를 넘어 재수 없으면 200살까지 사는 시대가 됐다. 백년해로해도 나머지 백 년이 남아있다. 대충 60까지 한 배우자와 살아가는 것이 결혼생활의 전부이던 과거와는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가족을 위해 인생을 포기하는 것보다 각자의 인생도 중요함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결정을 존중해주려는 움직임도 생기고 있다. 그래서 졸혼이나 황혼이혼 같은 개념들이 등장하게 됐다. 어느덧 식순은 주례사까지 넘어가 있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했으니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가 온전히 백발이 될 때까지 두 분 각자의 삶을 하얗게 불태우십시오"
툭. 눈물이 떨어졌다. 30년 전의 그 날처럼, 아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원했던 결혼이었고 우리가 원한 이혼이다. 그러니 저 눈물 속에 후회나 아쉬움이 들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자니 30년을 배우자로서 함께 살아온 나도 마음은 복잡했다. 굳이 말하자면 시원한 허전함이랄까.
"이제 아내는 아내가 아니라 박예현 자신의 길을 향해 행진하겠습니다"
아내는 회계사였다. 일했던 회계법인에서도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고 사이트에 나가서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면 항상 스카우트 제의가 양으로 음으로 들어오던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커리어 우먼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워킹맘으로서 일과 육아를 동시에 처리해 내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아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전념하고 회계전문가로서 살아가기를 바랐지만, 아내는 육아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 결국엔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누구보다 멋지게 인생을 펼치며 살았어야 할 한 사람이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만 살아오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우리가 원해서 아이를 가진 것이고 물론 나도 육아부담을 함께 나누려고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내에게 육아라는 족쇄를 채워버리고 날개를 아무리 푸드덕거려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장에 가둬버린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자녀들이 다 커버린 지금이라면, 이제 그 족쇄를 풀어도 되지 않을까. 그녀가 식장 밖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에는 결혼행진곡이 아닌 다른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 이혼 플래너가 기대하라더니 이거였었나. 피식 웃음이 새 나왔다.
"이제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 주강훈 자신의 길을 향해 행진하겠습니다"
나는 파라과이로 넘어가 팥빙수 장사를 하려고 한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파라과이로 수출되는 냉장고의 60%를 판매하는 회사였다. 주재원으로 파라과이에 있으면서 만났던 현지 친구들에게 한국문화를 소개해줄 때마다 빙수는 항상 이목을 끌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온 냉장고라는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빙수를 이용했던 것이었지만, 의외로 냉장고보다도 빙수가 반응이 좋았다. 예상치못했던 빙수의 인기는. 파라과이가 아이스크림은 있어도 빙수는 없는 나라였기 때문일까. 아무리 자식이 다 컸어도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다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테지만, 모든걸 훌훌털고 나 혼자 넘어간다면 어떻게든 해볼 자신은 있었다. 행진이 끝나갈 수록 내 발걸음도 위풍당당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보폭도 걸음겅이도 거침없어졌다. 위풍당당행진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30년 전, 결혼식이 끝난 뒤 손님들을 모두 보내고 느꼈던 감정은 후련함이었다. 30년이 지나 오늘 이혼식도 끝났다. 손님들도 모두 떠났다. 그리고 아내도 떠났다. 아니지 이젠 아내가 아니라 박예현이란 사람도 자신의 길을 향해 떠났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 주강훈으로서 홀로 서있으니 다시금 시원한 허전함이 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허전함 사이로 새롭게 열릴 인생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인생에 한쪽 문이 닫히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그 문만 바라보며 슬퍼할 것이 아니라 새로 열려있는 수 많은 다른 문들에 호기심을 가져야한다. 나는 내 이혼식 덕분에 그 수많은 열린 문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자, 그럼... 이제 아순시온으로 가볼까"
* 이 글은 Random Restaurant 기획 글 입니다.
Random Restaurant, Weekly cuisine 프로젝트란?
그 주에 인기가 있었던 단어들을 무작위로 조합한 제시어를 공통으로 활용하여 산출물을 만들고 주 1회씩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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