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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May 09. 2020

산화공덕(酸化功德)

손가락 끝에 머무는 녹슨 구리의 향기

왠지 설레는 토요일 아침을 맞이한다. 눈뜨자 마자 기타도 연습하고, 어릴 때 좋아했던 시도 떠올리고, 신나는 노래도 생각나고 Feelin' Groovy 해 진다. 주중의 울기가 가고 조기가 찾아오고 있나 보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김소월 '진달래꽃' -


국어시간에 졸지 않고 귀를 귀울였다면, 선생님의 판서에 눈길을 줬다면, 좀 더 나아가 공책 또는 교과서에 형형색색 0.5mm 볼펜으로 필기라는 걸 했다면, 서한샘의 EBS 국어강의를 시청했다면,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둠칫둠칫. 바로 '산화공덕'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판서는 정말 고대어에 가깝다.


요즘 '나를 밟고 가라'는 표현은 택지개발로 집을 빼앗긴 사람들, 빼앗긴 척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 말고 진짜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하루아침에 다니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등 막막한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주로 쓴다. 저 시처럼 남녀가 헤어질 때 그런 말을 쓰면, 시에서는 화자의 젠더가 약간 불분명하지만 그것도 여자가 썼다고 하면 엄청 크게 화낼 사람들도 있다. 아주 옛날에 어원이 같은 염색약 이름이 있었던 것 같다.


산화공덕散花功德. 꽃을 뿌려 공덕을 기린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쓰는 말이라고 한다. 불교의 발원지가 인도라서 그런지 발리우드 영화들은 그렇게도 춤 추고 노래 부를 때 꽃을 뿌려댄다. 한국의 정서도 눈물 참고, 꽃 뿌리고, 짓밟히던 시절에서 많이 밝아졌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버스커버스커 '벚꽃엔딩'


이렇게 밝으니 뭔가 생산적이고 발전적이다. 같은 산화散花의 상황이지만 공功과 덕德은 잠시 내려두고 그 아래서 편편황조翩翩黃鳥 자웅상의雌雄相依 하듯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미음완보微吟緩步 해보자는 것이다. 이 문장을 통해 나는 국어시간에 많이 졸진 않았음이 증명된다. '자웅상의'는 '태양의 후예'에서 윤명주 중위가 소개팅 사진을 보고 분노하며 '암수가 서로 이렇게 서로 정다운데'라고 인용하여 그녀도 국어시간에 집중했음을 증명했다.


연필로 쓰기였으면 엄두도 못 냈을 한자어 부기가 이렇게 쉬울 수 있다니 현대기술에 감사한다. 나는 꽤나 악필이라 워드프로세서라는 문물이 나왔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벚꽃 잎이 울려 퍼진다는 표현은 이미 답을 읊조린 분도 계시겠지만 그 이름도 유명한 공감각적 이미지다. 시을 청각화 했다.


오늘 아침 나의 산화공덕은 새벽같이 기타를 잡고 한참을 넘어가지 않는 두 소절을 연습하고 난 후 뇌리에 박혔다. 왼쪽 손가락 굳은살을 점검하던 중 녹슨 금속 냄새를 맡았다. 클래식기타 줄은 높은 음 세 줄은 나일론으로, 낮은 음 세 줄은 나일론 실에 금속 철사를 칭칭감아 만들어진다. 금속은 대부분 구리인데 거기에 은도금을 하기도 한다. 손가락 끝의 땀과 구리가 만나면 산화가 일어나 녹슨 냄새가 난다.


나의 산화공덕酸化功德은 '구리가 산화된 냄새를 낼만큼 애를 쓰면서 공과 덕을 쌓는다'는 의미이다. 무더운 여름 훈련병이 각개전투장을 뛰어다니면 방아쇠에 걸었던 검지손가락에서 그런 냄새가 난다. 체력장 만점을 위해 철봉에서 안 떨어지려고 악착같이 매달리면 손에서 그런 냄새가 난다. 연탄을 실은 리어카의 핸들을 잡고 고갯길을 오르고나면 면장갑 위 빨간 고무코팅에서 그런 냄새가 난다.


편하게 기타나 퉁기며 고된 노동과 어깨를 견준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오늘은 휴일이니까. 나의 노동도 가치를 창출하고 가계를 지탱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곳에 잘 쓰이면 좋겠다.

노동자 만세! 갑근세 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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