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아 쎄한데? 키워주면 도망갈 놈 같애.”
퇴직 후, 길어지는 재취업 기간. 점차 가라앉는 마음에 새로운 기술이라도 배워보자 스타트업 회사에 지원했다. 면접인가? 아님 사업소개인가? 싶은 대화. 그래도 괜찮은 포트폴리오가 있었지. 상기하며 밝은 표정을 하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대표님께 말씀드리고, 연락 드릴게요!”
어찌됐든 사무실 괜찮아 보이지 않는가. 많이 가르쳐준다지 않는가. 잡아준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집에 발을 들일 때 전화는 왔다. 3개월의 기다림이 끝났다! 왜인지 마음은 그렇게 밝지 않다.
친구들을 불러 알게 모르게 칙칙한 벽면에 밝은 페인트를 칠한다. 프로젝트가 어떻고, 나중에 어떻게 될 수 있을 것 같고. 일단 머리 박고 커봐야지! 사실인지 바람인지 나는 모른다. 격려를 받고 먹는 대로 대접한다. 그리고 돈 뱉을 준비를 하는 카드에게 말을 건넨다.
‘이번엔 일부러 더 쓰고, 몇 년 죽었다 생각하고 해보자!’
오랜만의 아침 버스는 부대낌도 색달랐다. 어떤 사람이 있을까. 프로젝트가 규모가 있어 보였는데 잘 할 수 있을까? 코로 크게 숨을 들이쉰다. 쭉 면발 뽑듯이 길게 내쉬며 공기에 씻어버린다.
“OJT 필요한가? 바로 할 수 있잖아?”
“말 편하게 할게? 어? 난 진짜 편하게 한다.”
“밥 먹으러 가자.”
“대구 출신이네. 대통령 누구 뽑았어?”
“C안은 씨발이 아니에요.”
“그래? 씨발인 줄 알았는데? 하하하”
…
자유로운 분위기. 새로운 회사니까. 이런 문화도 있겠지. 그래도 공격적이진 않다. 즐거운 로스팅 아니겠는가? 다들 웃기도 하고. 그리고 오후가 되어 나를 부른다.
[용역 계약서]
갑(OOO)은 을(OOO)…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계약해봤지?”
상사의 방 안, 협탁 위에 놓인 나란히 놓인 두개의 생소한 계약서. 연신 들락날락하며 농담하던 그는 바쁘다. 이런 곳도 있구나. 이런 곳도 있구나… 업종이 특수해서 그런가? 내게 불이익이 되는 조항이 없는지 본다. 인턴 기간인 건 알겠지만 만근 시 월차 발생이 없다.
“월차나 휴가 관련 규정은 어떻게 되나요?”
“아 그거 유도리 있게 해주지. 어머니 오셨다거나 그런 일 있잖아? 그럼 바로 보내줘. 말만 하면 돼.”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 머리에 3개월이 얹혀 있었나. 흔들바위마냥 달린 머리는 끄떡끄떡 거리며 말한다. 대화 방식도 그렇고 유연한 조직이니까. 지금 이게 내 수준인 거겠지. 좋게 보이자하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내일 업무가…’
버스를 기다리며 내일 할 일을 정리한다. 괜찮은 아이디어를 더 생각해야겠다. 좋은 아이디어를 보이면 더 빠르게 팀에 섞이겠지. 오랜만의 퇴근길 버스는 내 자리를 비우고 기다렸다. 편안히 자리에 앉자 딴 생각을 하는 흔들바위대신 손이 움직인다. 가방의 계약서를 꺼내어 눈앞에 보인다.
[용역계약서]
…
1. 인턴 을의 계약 기간을 O월 O일부터로 한다.
…
...
연봉이 아니라 월급으로 표기되어 있던 금액은 12를 곱하니 면접 때 안내와 공고보다 200만원이 적었다. 다시 읽으니 3.3% 원천징수로 4대보험도 가입이 안되는 계약인 것 같다. 인터넷을 찾는다. 용역 계약은 월차 관련 의무가 없다고 한다. 계약 기간도 없다. 수습은 '프-루브'만 하면 바로 바꿔준다 했던가. 면접 시 보여준 로비 같은 공간에 책상이 우겨 넣어져 있었다. 내 자리도 그곳에 있었다. 내 데스크톱엔 랜선도 없었다. 그리고 이전 프로젝트가 치우지 않은 방처럼 덕지덕지 얹어져 있었다. 200만원을 기폭제로 연쇄적 반응이 일어난다.
3개월간 쌓인 불안은 분노가 되어 발화한다. 분노가 되어 태우고 태우며 솟구치다. 한심함이라는 재로 머리위로 오소소 떨어진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가며 이런 것도 못 물은 건가.
야, 사실 이상한 건 너도 알고 있었잖아?
최신 페인트 마냥 덧칠한 밝은 색이 떨어진다.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친 도망자가 벽 너머 웅크려 있다. 밤새도록 그 벽을 보았다. 동틀 때까지 그놈의 작은 숨소리 듣기도 힘들었다.
‘끝내야 한다.’
망치를 가져와 벽을 때린다. 쾅쾅 벽이 울리자. 그제야 한 칸 방에서 소리를 지르는 창백한 놈. 재가 날린다. 팔을 뻗어 머리채를 움켜쥔다. 괴성을 지르는 놈을 꺼낸다. 아침 햇살아래 꺼낸 그 놈은 허연 몸에 재를 발라 시커멓게 숨어 있었다. 그 놈은 훌쩍이며 말한다.
‘문자, 문자로 하자’
범벅인 그 놈을 가방에 넣고, 출근 시간 한참 전에 나선다. 어둠 속에 들어간 녀석은 밖이 불안한 듯 숨죽여 웅크리고 있다. 다시 그 건물이 보인다. 심장이 뛴다.
‘그래, 비품만 챙기고, 문자를 남기자.’
이른 아침에 인기척은 없으나,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굳게 닫힌 문. 받았던 카드키는 보안 해제가 안된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던 옆자리 신입이 떠오른다. 그래. 그래. 그 사람 출근 시간 맞춰 후다닥 챙겨 도망가자.
2시간이 남아 근처의 공원으로 발을 옮긴다. 밤새 폰을 던져 놓아 배터리도 없다. 문자를 보내려면 아껴야 한다. 상황이 밀리자 또 심심하다. 어릴적 모바일이 없었을 때처럼 하염없이 걸으며 괜스레 읽을 거리를 찾는다. 마침 독립운동가의 묘를 기념한 공원이다. 둘레길을 따라 그의 말을 남겨놓았다. 광복을 못보고 간 그의 장례식 사진도 눈에 들어온다. 커다랗게 달아놓은 말, 좌절하지 마시오. 힘을 기르시오.
몇 바퀴를 돈다. 조깅을 하는 사람들.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 휠체어에서 바람 쐬는 사람. 산책하는 개. 아직 우는 귀뚜라미. 아무일 없다는 듯 일상적인 공간. 글귀를 굴리며 반복해서 걷는다. 세상은 똑같네. 다시 굴린다. 그래 뭐든 해보지 뭐.
다시 건물 앞에 섰다. 여전히 조용한 건물. 엘리베이터는 바로 내려오지 않고 사무실 층에 멈췄다가 내려온다.
누구지? 회사사람인가? 가방의 그놈이 발버둥을 친다. 일순 휘청이는 마음. 하지만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대표가 내렸다.
나는 가방을 열어 젖혔다. 여태 웅크린 그 한심한 놈이 서서 말했다.
끝으로 인사하였을 때, 그 놈의 모가지가 쿵하고 굴러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