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트쿠키 Oct 28. 2022

'처음'이 가져다주는 것

화이트 샹그리아의 첫 주인공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 백영옥, 빨간머리앤이 하는 말 -





공천포에서 처음과 끝을 함께 한 공간이 있다. 바로 '게리가'. 게리가는 공천포에 도착했을 즈음에 오픈 한 곳이다. 작은 공천포 마을에서 첫 시작을 하는 그 장소에 든든한 동지애 같은 마음이 들었다. 게리가는 호주인 남편 게리와 한국인 아내 써나가 운영하는 캐주얼한 브런치 카페이다. 공천포 바다를 마주하고 있어 앞마당 삼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부모님과 있을 때는 들리지 못했지만 혼자일 때 주로 자주 찾아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크림라떼를 주문했고, 그다음부터는 샹그리아를 주문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샹그리아는 레드 와인에 각종 과일로 담가 차게 마시는 와인이다. 하지만 게리가에서 처음 받아본 샹그리아는 화이트 샹그리아. 샤도네이 와인으로 각종 과일과 탄산수를 조금 넣어 만든 와인이었다. 처음 봤기 때문에 낯설었지만 좋았다. 맛은 더욱이 좋았다. 바다를 보며, 노트북을 하며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스파클링이 기분 좋게 톡톡 마음을 건드렸다. 어느덧 혼자 남은 가게에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수줍은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샹그리아 어떠셨어요? 제가 처음으로 도전해본 거예요."

"저 너무 신선하고 맛있었는데 오늘 처음 해보신 거라고요?"

"네. 처음 해봤어요. 맛있었다니 다행이에요. 레드 샹그리아도 한잔 더 만들어드릴게요."


사실 처음 샹그리아를 주문한 날은 제주도에 비가 조금씩 오고 날이 흐려서 외출하기 애매한 날이었다. 가려고 했던 숲길을 미루고 공천포를 돌아다니다가 편하게 바다를 보기 위해 게리가로 들어갔다. 좋았던 날씨 탓에 꿀꿀했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예상치 않았던 작은 일들이 하루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샹그리아 한 잔을 받아 바다를 보며 홀짝였다. 한 모금씩 마실수록 기분 좋음은 배가 되어 갔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며 함께한 낮술 탓인지, 샹그리아 두 잔을 마신 탓인지, 내가 화이트 샹그리아의 첫 주인공이어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흐린 날씨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공천포의 조용한 작은 마을이 사랑스러웠고 오늘의 하루가 매우 사랑스러웠으니까. 


'처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맨 앞'이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하루하루 처음의 연속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처음'은 살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오감을 자극하고 마음속 깊은 추억이 된다. 그것이 좋든 싫든 상관없이 마음속 깊이 자리를 잡는다. 사장님께서 처음 도전한 화이트 샹그리아 한 잔이 나에게 그러했다. 첫 제주살이를, 공천포의 첫 바다를 추억하게 만들어주었고, 나의 처음들을 되짚어보게 했다. 


이전에 게리가에서 커피를 마실 때 옆자리 여행 온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얼핏 듣게 되었다.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나 공간 자체가 자연스럽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둘의 대화 소재는 첫 직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친구는 취업준비생으로 어려움을 토로하며 계약직부터 시작해서 정규직으로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는 회사에 재직 중인데 지금 회사가 어렵게 들어간 첫 직장인만큼 평생직장으로 다닐 거라는 그런 대화였다.


우와, 평생직장으로 다닐 거라는 저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도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확신이 조금이라도 있었나 덩달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가서도 이직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아직 평생직장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첫 직장을 선택할 때도 '평생 직업으로 해야지', '평생직장을 고민해봐야지'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다'를 생각했고,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잘할 수 있는 일 중 그나마 재밌는 것'을 찾았다. 그런 상황과 선택들이 매 순간 연결되어 지금까지 왔다.


생각해보니 첫 직장은 홍보 커리어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처음 접했던 언론사 시스템, 처음 작성했던 마케팅 기획안이 지금의 나로 성장시킨 것과 다름없다. 시간이 흐른 추억은 일부 미화되어 기억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첫 사회생활이어서 어려움은 있었지만 충분히 설레었고 열정적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이직한 회사에서의 첫 출근날도 어려웠지만 설레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늘 나에게 처음의 감정은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몸과 마음이 처음을 기억하는 것과 그것을 지속하는 것은 다른 의미다. 나는 어쩌면 지속하는 힘보다 처음이 안겨주는 힘에 더 강렬하게 종속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스갯소리로 첫 마음과 의지를 느끼고 싶어 이직을 계속하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이렇게 연결 짓다 보니 '처음'은 나를 다잡아주는 단어였다.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열정을, 더 커지고 싶다는 의지를,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잡아주고 지지해준다. 나는 서울에 올라가서 다시 '처음'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다섯 번째 회사가 될지, 그 무엇이 될지는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또 한 번의 설렘과 몇 년간 잊고 지냈던 오감을 자극해줄 그 무언가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거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게리가에서 맛본 화이트 샹그리아가 가져다준 기분 좋음처럼.      


 


   




<제주를 보다> 조용한 공천포구, 바다를 품은 카페


01. 게리가

깔끔한 베이지톤 인테리어와 바다 뷰의 조화가 예쁜 곳이다. 여자 사장님이 만들어주시는 커피와 샹그리아도 맛있지만, 게리 사장님의 호주식 토스티도 정말 맛있었다. 내용물도 가득하고 사이드로 나오는 병아리콩 샐러드가 맛있었다. 빵순이인 나는 샹그리아와 토스티로 이따금씩 사치도 부려봤다. 바다를 바라보며 좋아하는 2가지를 함께 하는 순간은 정말 공천포가 사랑스럽다. 내가 있을 때는 6시 마감이어서 항상 아쉬웠는데, 요즘에는 '호주 와인의 밤'이라고 해서 3종류의 호주 와인과 핑거푸드를 즐기는 이벤트도 특정일에 여는 듯하다.     




02. 카페숑

공천포구에서 위미리로 향하는 방향 끝에 위치한 작은 카페이다. 내부도 작지만 바로 앞 바닷가를 품은 창문은 드넓다. 창문에 걸린 바다가 꼭 그림같이 보인다. 사장님도 친절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라서 멍하니 바다를 보아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다. 공천포식당 바로 옆에 있어서 식당 다녀온 후 후식으로 많이들 찾기도 한다. 초코+커피+생크림이 조화를 이룬 초코라떼를 마시며 창문 너머의 윤슬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이전 12화 E가 I가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