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모레면 마흔인 너를
<논어> 위정편에서 공자는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마흔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음을 언급했다. 미혼이자 마흔이 코앞인 38살. 빠른 나이가 있던 시절에 만난 친구들은 39살이어서 이 두 나이를 공존하며 지금까지 왔다.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무수히 흔들리는 시간을 맞으며 보내왔다. 이러한 시간이 지나면, 아니 조금 더 버티면 마흔의 시간을 보낼 때의 나는 덜 흔들리고 단단한 판단들을 할 수 있을까.
"너도 내일 모레면 마흔이야"
내가 누구보다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인지, 지금이 생각이 많을 시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쩍 요즘 '마흔'이라는 글자에 눈이 갔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언제부터인가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을 맞이하듯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시기에 서점에는 '마흔 살 위로 사전', '마흔, 다시 만날 것처럼 헤어져라' 등등 마흔을 겨냥한 책들이 보란 듯이 줄지어 있다. 유독 홍보문구 또는 책 네이밍에서 '마흔'과 함께 붙어 다니는 키워드는 '청춘', '사춘기', '앓이', '시작'이다. 20대의 청춘과 30대 사회인으로서 생활하며 지난한 사춘기를 드디어 끝냈다 생각했는데, 40대에도 같은 키워드라니. 불현듯 나이가 드는 재미와 보람보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예전에 즐겨보던 응답하라 1994에서 삼천포가 한 내레이션이 떠오른다.
"산다는 것은 매 순간 선택이다. 설령 그것이 외나무다리라 해도 선택해야만 한다. 전진할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아님 멈춰 설 것인가. 결국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지점은 과거 그 무수한 선택들에 결과인 셈이다. 내 지난 선택들을 후회 없이 믿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정답이고 그것이 가장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이다."
10여 년 전 20대에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에 공감하며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가야지 다짐했던 구절 중 하나이다. 내가 한 선택들을 믿고 최선으로 만들겠다는 다짐, 그래서 후회 없이 나아가겠다고 외치던 그 시절. 다짐과 의지만으로도 스스로를 빛낼 수 있던 시절에 말이다. 지금은 다시 들여다본 문장 속에서 혼자 트집을 잡고 있다. 무수한 선택들을 그 순간에 열렬히 사랑했음에도 지금 내가 서있는 지점은 왜 예측하지 못한 변수 속에서만 만들어진 결과물의 집합체인지. 정답도 찾지 못하고 멋지게 나이 들어가기는커녕 애꿎은 문장들을 곱씹으며 탓하고 있다. 이렇듯 어리숙한 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흔만 되면 단단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30대를 맞이한 1월에 거의 자정까지 회사에서 사업계획과 당시 규정들과 씨름한 기억이 난다. 그때는 30대가 왔다는 시간의 변화보다 내일 보고해야 할 계획과 자료정리, 수많은 피드백의 시간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후부터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에 올해의 목표를 작성하기 전에 늘 "나를 알아가자 그리고 사랑하자"라고 맨 위에 적었다. 그 어떤 중심에 나를 우선으로 하자는 다짐에서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이어리에 문장을 적는 것은 어느덧 의식처럼 되었을 뿐 난 여전히 나를 헤매고 있다. 그래서 더욱이 이번에는 둘러 쌓인 상황에 정신없이 치이기보다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며 마흔이라는 시간을 맞이하고 싶다.
10대에는 밝음과 슬픔의 모순을 가지고, 20대에는 무모한 용기를 가지고, 30대에는 호기심의 열망을 가지고 수많은 갈림길 속을 걸어왔다. 마흔에는 진정한 내가 여러 이정표 속에서 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걸어가기를 바란다. 마흔이라는 시간과 함께 온전한 나를 맞이하고 싶다. 여전히 기존에 했던 수많은 선택들과 결과에 계속 흔들리더라도 덜 흔들리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잘 흔들리며 맞이하고 싶다. 이따금씩 흔들리는 순간을 인생의 짤막한 유머로 받아들이면서. 엄습하는 불안을 조금씩 다독이며 그렇게 맞이하고 싶다.
다가올 수밖에 없는 너를
나는 즐겁게 맞이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