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완성할 수 있을까
우연히 친구를 통해 임기제 공무원을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일명 계약직 공무원이다. 일반행정 외에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홍보, 기술, 전산 등의 분야에서 임기제 공무원을 채용하고 있다. 공무원의 큰 장점인 정년과 공무원 연금의 안정성이 없는 대신 그것을 미리 포함하여 같은 직급의 공무원보다 꽤 높은 연봉을 받는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행정안전부에서 홍보분야의 주무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행정안전부가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1년여간 왕복 4시간 가까이 통근으로 출근했다. 이 때는 체력적인 한계로 인해 2년 간의 계약기간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서울에 있는 정부 위원회의 홍보팀 사무관으로 이직과 나름의 승진을 함께 했다. 또다시 임기제 공무원으로.
어쩌다 보니 첫 사회생활부터 공무원 생활까지 계약직으로 시작해서 계약직으로 끝났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9년 가까이 지났을 때 그렇게 되어 있었다. 계속 계약직으로 커리어를 쌓았던 이유를 곱씹어보면,
* 계약직이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 운이 좋아서 좋은 직속 사수와 동료를 만났다.
* 산업은 다르게, 하지만 홍보업무로 일관된 커리어를 쌓았다.
앞서 말했듯 운이 좋아서 첫 직장생활에서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부당함과 차별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드라마나 커뮤니티에서 보이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커리어를 쌓기 위해 내가 선택한 직업군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연봉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그건 내 몫이었다. 연봉에서 정규직과 차별적인 대우가 존재하는 계약직을 선택한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만이면 내가 다른 자리로 가거나 정규직이 되기 위해 노력했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사한 인복도 한몫했다. 계약직끼리 밥을 먹는다거나, 사원증 목걸이가 달라서 갈린다거나, 사수가 다른 정규직 직원과 차별한다거나 이런 극적인 상황이 없었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가 좋을 수는 없지만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상황은 없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위원회의 경우는 정권이 바뀌면서 폐업이 되어 최초로 비자발적으로 회사를 나온 케이스이다. 근무를 마칠 때까지 홍보팀장님은 회사 폐업 후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곳이 있는지 늘 관심을 갖고 여러 채용정보를 알려줬다. 폐업 후 업무가 종료된 후에도 팀장님은 영국 유학을 가시기 전까지 나의 다음 스텝을 함께 고민해 주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하셨다.
"제가 고마워서 그래요.
함께 일하는 동안에 팀을 위해 잘해주었기 때문에 꼭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도움을 주실 때마다 연신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나에게 팀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여러 번의 회사를 거치며 이런 상사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안다. 이러한 감사한 운 덕분에 계약직이라는 프레임 없이 회사와 동료, 업무를 바라보고 일할 수 있었다.
"정규직이냐 계약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네가 네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해"
10여 년 전의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자발적 계약직을 추구하는 미스김이 정규직이 되고자 하는 또 다른 계약사원인 정주리에게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한다. 업무를 하면서 느낀 것도 있고 계약직이더라도 이직할 때마다 연봉을 계속 높여갔다. 그 회사에서 일을 할 때만큼은 성과를 최고로 받아 다음 해의 연봉을 더 높였다. 일관된 홍보직무를 한 탓에 지난 커리어가 계약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기업의 홍보팀장 오퍼를 받기도 했다.
전 편에서 언급한 '업'에 대한 후회와 불안이 찾아온 건 계약직으로서 일을 해서가 아니다. 한 곳에 오래 일하지 못한 버티는 힘이 부족한 것에 대한 후회와 불안이다. 문맥상 같은 의미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다르다. 계약직이어서 한 곳에서 오래 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 10년 가까이 오래 일할 수 있었던 환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환경을 쫒은 것을 말한다.
나는 어쩌면 반대로 쉽게 다른 환경을 가기 위해 계약직만을 선택했을 수 있다. 이곳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빠르게 발을 빼겠다는 마음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처럼. 이직 스토리를 그럴싸하게 나열했지만 지금 결과적으로 보면 에너지가 많이 쏟아 잘 견디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벗어남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위원회가 폐업된 이후 이것저것 해보겠다며 손만 대고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방황하는 시간들 때문이다.
비자발적 퇴사 후에 바로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연차가 쌓이다 보니 시작할 수 있는 작은 기회들은 있었지만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잠시 쉬어갈 것인가, 무언가를 시도할 것인가. 계약직으로 커리어를 쌓아가다 보니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100세 시대인데 현실적으로 정년에 이를 때까지 이런 식으로는 오래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모두에게 암흑시대와 같던 코로나를 지나면서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직업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부터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나의 정년을, 미래를 '나만의 것'으로 보장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에 일을 이어서 시작하는 것보다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기 위해 시도하는 길을 선택했다. 어쩌면 더 이상 회사 다니기 싫다는 명분을 시도라는 단어로 감추었을 수도 있다. 왜 그런 열망이 생겼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보다는 직접 무언가를 생산해야겠다는 생각만 급속도로 퍼졌다.
기록하는 글쓰기 온라인 모임
임기제 공무원에 관한 전자책 및 직무수행계획서 첨삭
스마트스토어(미국, 영국)
3040 와인모임(수익화보다 재미와 시도에 의미를 둠)
행정사 시험
생각의 속도에 발맞추듯 2년 반 동안 위와 같은 일들을 벌였다. 말 그대로 벌였지 결과적으로 이끌어가지는 못했다. 여러 시도 중에 살아남은 것은 현재 스마트스토어와 행정사 시험뿐. 스마트스토어의 경우 수익화 구조는 되었지만 이전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큼 그 소득을 채우지는 못한다. 10월에 2차까지 완료한 행정사 시험은 현재 결과를 기다리지만 그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벌고는 있었지만 틈틈이 다른 것을 시도하고, 그 시도에 지치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로 인해 숨 쉬는 것의 두 배 이상으로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있었다.
모든 사정을 아는 친구는 그 시도 자체가 중요한 시간이라고 후회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라고 말해주었다. 지나간 시간이어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해주는 위로로 들렸다. 나는 좋은 경험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도전이라는 그럴싸한 단어와 행위에 치중했지 그 뒤에 결과물은 크게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금의 결과물을 평생으로 만들어나갈 방향도 동력도 찾지 못했다. 첫 시도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어느새 인간적인 자신에 대한 자존감은 낮아져만 갔다. 지난 커리어가 희미해지고 무색해지다 못해 무색이 되어가는 듯하다.
모든 시간을 지나온 지금,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은 정말 오만한 생각이었다.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과 방법이 오만했다. 이 기록은 그 시간에 대한 자기반성 또는 자기 성찰이다. 다가오는 마흔, 앞으로의 10년, 그 후 장년을 잘 맞이하기 위한 기록이다. 지금, 결코 늦은 시간이 아니라고 다독이는 외침이다. 좋든, 나쁘든 이 모든 것은 모두 나의 역사가 된다.
타인의 성공만을 잣대로 두었다. 그 저변에 있는 그들의 노력을 외면했다.
코로나와 함께 온라인 사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참여한 독서모임에서 우연히 다양한 오온라인 사업 모델들을 접하고 내가 가진 또는 할 수 있는 콘텐츠를 꾸렸다. 독서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온라인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업을 하며 대기업 직장인들의 평균 이상의 수입을 얻고 있었다. 지금까지 온라인 홍보를 해왔기 때문에 잘 따라 하면 나 또한 그들의 뒤를 이을 수 있다고 믿었다. 드러난 사실에만 현혹되어 착각을 자신감으로 여겼다.
하고 싶어서 혹은 잘해서 시작한 것이 아닌 누군가의 잘되는 사업모델이어서 시작한 것에 어찌 동기부여나 간절함이 있었겠는가. 결국 꾸준함보다는 단 시간의 결과만을 쫓다 보니 쉽게 지쳤다. 결과물은 당연히 원하는 대로 나올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자기 객관화가 부족했다. 그로 인해 자기 주도성이 점차 소멸했다.
무작정 시도하는 것보다 먼저 내가 무엇을 잘하고 가진 콘텐츠가 무엇인지 면밀히 분석해야 했다. 하나씩 시도할 때마다 시기별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대응하는 정성이 필요했다. 당장 '나만의 것'을 발굴하거나 성장시키지 못할 것 같다면 회사 소속으로 홍보일을 다시 이어가면서 천천히 준비하는 방법도 있었다.
나는 버티는 힘보다 상황을 변화하는 힘이 더 큰 사람인데, 명확하게 나아갈 방향을 세운 뒤에 시작했어야 했다. 나라는 사람의 성향을 간과했고 누군가의 방식을 우선시하는데 급급했다. 나만의 고민을 하지 않은 결과 시도에 있어 자기 주도성을 잃어갔다. 스스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 본인의 정년과 미래를 보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과 다름없다.
믿도 끝도 없는 낙관주의와 한탕주의
사주를 볼 때면 일복이 많아 평생 일할 팔자라는 소리를 매번 듣는다. 그래서였을까. 어떻게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지고 있었다. 회사만이 아닌 먹고사는 것은 다양하며 나는 지금 그것을 배우는 중이라고. 잘하면 각종 SNS에서 자주 등장하는 또래와 같은 성공한 사람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어떻게든 잘될 거야'라는 낙관주의와 함께 성취보다는 성공에 대한 환상만 가득했다.
찬란히 부서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대 실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찬란하게 부서졌다는 결과를 얻은 거죠.
물론 상실한 시간을 견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살다 보면 또 설레는 일은 생기거든요
- 편지가게, 글월 -
프리랜서이자 회사원. 2024년 10월, 다시 회사에 일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치 첫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것만 같다. 다만, 이전과는 일에 대한 자세가 다르다. 혼자 일을 해보니 콘텐츠와 사업을 구체화시켜 나간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보통 내공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닌, 마흔 이후의 스텝을 위한 내공을 쌓는 과정의 일이다. 앞으로 일은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와 단어가 아닌 나의 정체성을 다듬어내어 뾰족하게 담아내는 동사로서의 일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닌 일과 함께 '나만의 무기'를 만들어나가려고 한다. 기존에 유지하고 있는 스마트스토어를 활성화시키고, 평생 활용할 수 있는 행정사 분야를 나만의 콘텐츠로 갈고닦을 생각이다. 앞으로의 10년을 보며 조금 더 천천히, 세밀하게. 40대가 끝나는 시점에 지금과 같은 통렬한 자기반성만 남지 않도록 말이다. 이렇듯 마흔을 앞둔 시기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환경에 서 있다 보니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외치고 있다. 쫄지마라고.
마흔은 다시 시작하기 좋은 나이이다.
생물학적 나이에 집착하지 말자
통계청에서 발표한 중위연령은 1994년에는 28.8세였으나 2024년의 중위연령은 46.1세이다. 인구 연령의 중심을 의미하며 사회와 경제 그 중심에 있는 나이를 의미한다. 김미경 '마흔'수업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따라 생물학적 나이보다 17세살을 빼고 그 나이처럼 생활하라고 한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만큼 현실에 맞는 라이프스타일과 감성나이를 맞춰서 살라고 말한다. 내 나이에서 17살을 빼면 아직 창창한 20대 초반이다. 뭐든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 마흔은 어느덧 남은 인생을 중장년, 노후라는 단어에 얽매이지 않고 한 번 더 나에게 기회를 주는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