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동네 어른들은 내가 살던 인근의 저수지에는 한 많고 억울한 수살귀가 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밤에는 그쪽은 가지도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물이 깊은 곳이라면 실수든, 자의든, 타의든, 사람이 죽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은 대부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곤 했다.
지금이 몇 세기인데 귀신이 있다고?
저수지는 수영을 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고, 뚝 방길은 45도 각도로 비스듬해서 발을 헛디디면 저수지 안으로 굴러 떨어질 상황이니 함부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십여 년 이상을 사는 동안 이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다는 극한 가뭄이 들었어도 주변바닥은 볼 수 있었지만, 가운데 쪽은 물이 고여 있어 그 모습을 보지는 못 했다.
한쪽은 산자락과 연결되어 사람이 다닐 수 없었고, 둑방 끝엔 마을이 없고 저수지만 덩그머니 있었으니 굳이 그쪽 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저수지와는 달리 인근 면소재지를 3개나 끼고 있을 정도로 넓이도 엄청났고, 깊이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마을 어르신들도 한평생 살면서 가뭄으로 하천바닥이 쩍쩍 갈라 져도 저수지의 바닥을 본 적이 없었다니.
익사사고가 나면 건져 올린 시체들은 도로 가까운 둑방 위에 올려놓곤 했다.
평소와 달리 둑방 위에 오가는 사람이 많아졌다거나, 흰 천에 싸인 물체가 보인다면 그 건 사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누가 무슨 이유로 사망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으나 실수든 고의든 일 년에 서너 명씩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기억에 남는 일 중의 하나는 젊은 커플이 연달아 자살을 하면서였다.
들은 얘기로는 결혼을 반대하는 양가 부모 때문에 예비신랑과 신부가 동반 자살을 하려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예비신부는 그대로 사망했고 신랑 될 이는 수영을 해서 살아 올라왔단다. 결국 애꿎은 여자 친구만 죽은 셈이다.ㅉㅉ
혼자만 살아 돌아온 예비신랑은 자신의 행동에 땅을 치며 통곡을 했고,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매일 그곳을 찾아와 죽은 여자 이름을 목놓아 부르곤 했다는 얘기가 인근 어죽집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마을사람들에게 혼자만 살아 나왔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던 그 남자는, 며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결국 여자의 뒤를 따라갔단다.
그 후 비가 오는 밤이면 그쪽에서 남ㆍ녀가 웃고 떠든다는 등, 목을 놓아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은 낚시꾼도 오지 않아 그곳은 인적이 더 드문 곳이 되었다.
금방 무친 겉절이에 매콤한 어죽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어죽 집이 가장 피해가 심한 상황이 되었지만 골수 단골들의 발길은 여전했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으로 걸쭉한 어죽을 먹을 때마다 " 이 물고기는 사람 시신을 뜯어 먹고 살았을거야" 하면서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릇을 싹싹 비웠다.
그렇게 저수지는 인근 농토에 물을 대줄 뿐만 아니라, 어부들에겐 물고기를 내주는 풍요로운 엄마의 품처럼 넓었지만, 때론 무섭고 겁나는 일들이 벌어지니 양면성을 지닌 야누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