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산불에도 뿌리가 타지 않은 나무처럼
명상 일지 과제6
오늘의 명상: 동적 명상(요가) 32분 + 정적 명상(좌선, 들숨 날숨 챙김) 11분
명상하려 눈을 감는데 순간 용서, 용서가 떠올랐다. 명상 지도자 수업 시간에 자애명상 발원문을 읽어본 까닭이다. 참고로 여기서 '자애'는 '자비'와 비슷한 뜻이다. 나는 용서할 수 있을까? 과거에 용서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앉은 이곳에는 과거가 없고 나 또한 거기에 없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결코 해서는 안될 행위들, 용서받지 못할 일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리 만물이 무상하고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정 불변의 존재는 없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보편적으로 윤리와 상식은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또한 여러 철학과 종교에서 말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계율'과도 관련이 있다. 불교의 불살생, 요가의 비폭력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나에게 해를 끼친 존재의 행복을 바라는 일, 이 문장은 위선적이다. 다른 이에게 큰 고통을 준 존재들, 역사적으로든 아니면 지금 현실에서든 아무 맥락 없이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일은 한편으로는 무책임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잘못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모두가 서로에게 해를 끼치며 자신의 이득만을 취하며 살아가는 지옥이 될 것이다. 누군가를 해한 자는 그와 비슷하거나 또는 더한 죗값을 치르며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알고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죄인이 본인의 과보를 모른 채 즐거이 살아가는 일보다 그 자신의 인격적 성장은 물론 세상에 도움이 되는 훨씬 값진 일이다. 악의를 가지고 남을 해치는 한 개체의 행복과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의 행복, 이 두 가지가 저울 위에 놓인다면 무엇을 구해야 할까.
그리고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나는 용서해야 하는가? 어쩌면 내가 생사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붙잡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용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언뜻 본 자애명상 발원문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하게 느껴져서 이때까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마음이 아마 바탕에 있었을 것이다. 반복된 명상으로 마음이 좀더 확장되고 통찰의 힘이 어느 정도 생긴 지금, 낮에 본 그 구절을 마음으로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당장 바꿀 수 없으므로 덮어놓고 나는 (아마도) 괜찮다고 정신 승리를 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는 아닐 것이다. 혹은 그간 운 좋게도 딱히 용서할만한 일이 없어서 모든 존재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진정한 자비는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 대자비심을 모른다.
단지 나를 위해서 용서할 수 있다. 다시는 어느 생에서라도 얽히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 박힌 가시와 같은 악연을 떼어낸다. 어느 양자 역학 실험에서 세포를 이루는 작은 단위인 ‘전자’가 눈으로 보지 않으면 파동, 눈으로 보면 입자가 된다는 이론처럼, 그저 파동으로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렇게 마음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며, 남아있는 한으로 언젠가 다른 생에서 내가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나의 원대한 목표는 가능하면 이번이 마지막 삶이 되는 것이므로 이 악감정이 원인이 되어 다시 윤회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도록, 용서함으로써 속박에서 벗어날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그물 속에 서로 얽히고설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지켜본다. 식물들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본다. 별들이 서로 비켜 가거나 부딪혀 우주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본다. 몸속 세포가 나타나고 할 일을 다 하고 소멸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본다.
업에 따른 결과가 반드시 주인을 찾아갈 것을 알기에 나는 거기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벗어날 수 있다. 나 자신을 내가 나서서 더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시련의 시간을 버티고 살아남은 나는 산불에도 뿌리가 타지 않은 나무처럼 봄의 햇볕에 새 가지와 새싹을 찬란하게 틔울 것이다. 그렇게 다시 세상을 정화하는 나무처럼, 숨을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