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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Sep 29. 2023

코르토, 그리고 글렌 굴드

아침에 코르토의 연주를 들었다. 쇼팽 발라드 1번. 그는 시적인 연주를 하고 있다. 최근에서야 생각하게 된, 피아노는 시일 수도 있다는 그 멋진 영감을 실현시켜주고 있는 연주라고 느껴진다. 몇몇의 미스터치와 같은 사소한 문제들이야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마법, 그것은 완벽을 과감히 포기하는 데서 오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을 창조해내기 위해, 그것을 실감나게 만져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기교상의 완벽을 포기해버린 그 과감함, 그것은 현재 활동하는 연주자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피나는 연습으로 실수를 예방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연주에서 어떤 기계와 같은 완벽함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그 안에 있음, 그 음악이 하나의 완성도를 가지는 것, 작곡자의 의도와 연주자의 해석이 운명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이다.


코르토의 연주를 듣고나서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를 듣다보면 뭔가 빠졌다는 느낌이 드는데 아무리 유명한 연주자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엇일까. 시대적인 배경이 달라서는 아니다. 동시대의 연주자들과도 다른 그의 연주는 마치 내가 쇼팽의 집에서 연주를 듣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끔 한다. 쇼팽이 어떻게 쳤는지는 알수 없기에 그저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저 코르토가, 쇼팽의 충실한 대변인이 되어 그의 감성을 재현하려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감성, 그것은 연주자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미덕이다. 기교는 연습하면 되지만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감성은 훔칠래야 훔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전문 연주자들의, 또는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감성을 느끼고 찬양하게 된다. 그저 한 번의 터치에 모든 전의를 상실해버릴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그것은 어떻게 가르칠 수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다. 차라리 어떤 성격적 면이, 다정하고 민감하면서도 원칙을 고수하는 어떤 부분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조화를 부릴 수 있게 한다면 믿겠다. 나는 코르토가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눈을 반쯤 감고 허공에서 손을 휘젓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그는 그저 건반에 적시에 손을 내려놓을 것이다. 귀를 민감하게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의 모든 인간적 약점들과 수많은 미스터치들은 가볍게 논외가 될 수 없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가 후회는 하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한다. 아니 후회하지 마시라고 하고 싶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연주를 가능케 한 과정이었다고 보고 싶다. 이것은 맹목적인 애정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후회할 선택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인간이다. 게다가 그는 후학을 양성하느라 연습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고 한다. 내가 그정도로 연주할 수 있다면 나는 연습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연습으로부터 음악을 보호해야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너무 많은 연습은 연주를 기계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어 하루에 두시간만 연습했다는 거장 호로비츠같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것은 천재들의 이야기이다. 아무튼 코르토는 디누 리파티와 같은 천재적인 후학을 양성해 내었고, 그 자신은 가장 쇼팽적인 마법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그의 연주에서 오리지널한 자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속삭여주는 듯한 순수한 이야기에 빠져들어버린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파리의 어느 방, 쇼팽이 혹은 코르토가, 어떤 연주자가 소수의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그 장면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 앗아가는 그 첫 소절의 적확함에 이미 나는 사로잡힌 노예가 되어 있다.


사실 주위 사람들에게 코르토를 추천해봐도 떨떠름한 반응이라 (아마도 미스터치 때문인듯) 나는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앙드레 지드마저 <쇼팽 노트>에서 코르토를 교묘히 디스하고 있는 것 같다. 쇼팽 음악에 대한 앙드레 지드의 의견은 다분히 설득력이 있지만 코르토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할 수가 없다. 그 자신이 먼저 코르토만큼 치면서 얘기해보라… 고 하고 싶지만 그건 개인적인 취향과 판단이므로 자제하겠다. 세상에는 글렌 굴드의 바흐 연주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시모어 번스타인 옹도 그 중의 한 분이시고.. 코르토와 글렌 굴드, 내 눈엔 충분히 고루하고 평범하지 않았기에, 작곡가의 의도에 너무나도 충실했기에 박해받는 순교자들이다. 사람들은 기교가 너무 완벽해도, 완벽하지 않아도 어차피 비판한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에게 안전하다고 받아들여지는 영역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주자가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숨겨야 한다면, 다수의 입맛에 맞추거나, 비난거리를 사지않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연주자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악보는 우리들 손에 떨어져 있다. 그것의 운명은 연주자의 손에 있다. 적어도 원곡자의 의도에 충실하거나 자신의 확고한 해석이 있다면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사실 프로페셔널 연주자로서 살아가는 고됨을 누가 알수 있겠는가. 아마추어였다면 더욱더 자신에게 그리고 곡에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충실할 수도, 실험적일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경계에 기꺼이 서서 자신만의 것을 해나가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애정과 경의를 표하는지도 모른다.


혼자 저세상 완벽함으로 가버리곤 하는 글렌 굴드에 비해 코르토의 연주는 바로 여기 나의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게 만든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그렇다, 나는 글렌 굴드가 바흐 연주에 사용했던 피아노(아마도 뉴욕 스타인웨이)와 코르토가 쇼팽을 연주할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피아노와 세팅을 갖추고 싶다. 저 피아노들만 있으면 비슷하게나마 그런 영혼의 울림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망상에 빠진다. 그리하여 작곡자와 나, 피아노 이렇게 삼위일체를 이루어... 하지만 일단은 우리집에서 아마도 가장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사실 먼지를 뒤집어쓴채 순교하고 있는 것에 가까운) 저 타협안, 카와이 디지털 피아노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염원하기 보단 가지고 있는 한에서 최대한을 끄집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나는 훌륭한 연주들을 쉽고 간편하게 들을 수 있는 축복받은 시대에 살고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천국으로 향한 발걸음을 한발한발 떼어야 하며 내 피아노가 지상 최고의 것임을 의심하며 또한 믿어야 한다.


https://youtu.be/_9GBjQyvtAM?si=DQiLZPTDDZYJqmy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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