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은 각자 다른 크기의 신체적 힘듦을 겪고 있는 다양한 사람이 공존하는 곳이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어떤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시간 내내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는데, 다른 쪽에서는 편안한 웃음과 대화가 오간다. 내가 PT를 받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 체육관에 머무는 나는 전혀 다른 신체적 상태를 경험한다. 그 모습이 어느 순간 초현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사람은 타인의 신체적 고통을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을까?
신체적 고통을 포함해서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은 타인에게 고스란히 건너가지 못한다. 데스크 탑에 있는 파일을 플래시 메모리에 담듯이 옮길 수 없다. 부모가 자식의 고통을 보며 애간장이 끊어진다고 느끼는 게 그나마 근접한 경우겠지만 그 역시 똑같은 고통은 아니다. 몸은 그토록 개별적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공감 능력이다. 대신 아파주거나 견뎌줄 수 없으니까.
내가 한 번이라도 겪은 고통이라면 상대적으로 쉽다. 생명을 위협하는 큰 병은 물론, 봄가을 알레르기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치통에 시달려보고, 허리 디스크로 누워서 잘 수 없어 보고, 이석증으로 천장이 빙글빙글 돌면서 먹은 걸 다 토해보고, 자연분만하다가 산모와 아이 둘 다 위험한 상황을 넘는 ‘사소한’ 병을 경험한 사람은, 최소한 같은 고통을 겪는 누군가를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불혹의 나이에 병이 찾아왔다. 2달 정도 나를 괴롭히다 홀연히 사라졌다. 추후 공부와 검색으로 일종의 공황장애가 아니겠나 짐작은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때 고통의 이름과 원인을 정확히 모른다. 온갖 검사 후 당시 미국의 의사는 “육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고, 스트레스에 의한 신경과민”이라고 했다. 푹 쉬고 잘 먹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때는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내며 내 인생 최고로 한가롭게 먹고 놀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통증을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반드시 원인을 찾아내 뿌리째 뽑아버릴 거라며 씩씩거렸다. <동의보감>을 읽었던 것도 내 몸은 내가 고치고야 말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게 불가능, 불필요한 일이라는 걸 안다. 병은 고치거나 신속히 없애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나의 일부였다. 내 삶의 좌표를 보여 주기 위해 몸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막 대학에 임용됐던 30대 후반, 내게 SOS를 쳤던 한 학생을 잊을 수 없다. 몇 번이나 상담 요청을 해 놓고도 그는 약속한 날 오지 못했다. 그때마다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사연은 다양했다. 지하철, 버스, 택시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는 등의 드라마틱한 설명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영혼 없는 위로만 건네었을 뿐, 그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려하지 않았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고 미안하다. 부디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 줄 누군가를 만났기를, 혹은 책 속에서 지혜를 얻었길 기도한다.
최근 10년 사이, 내가 만나는 청년들에게 공황장애나 우울증이 많아졌다. 수업에 나오지 않아 궁금해질 무렵이면 무겁고 긴 내용의 문자가 도착한다. 내가 10여 년 전 ‘그런 식’으로 아파보지 않았다면 사실 이해하기 힘든 사연이다. 속상하고 안타깝다. 내 경험을 공유하며 회복과 치유의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고 한다.
세상에는 내가 겪지 않았고 나와 일면식 없는 이들이 겪은 고통이지만 나를 괴롭히는 것도 있다. 사회적 참사로 자식을 앞세우고도 모자라 진실 규명을 위해 거리로 나서야 하는 사람들,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고령의 몸을 이끌고 수요집회에 참여해야 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자식의 아픔이 헛되지 않도록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의 고통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상상하기 쉽지 않다. 내 공감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도 1/100, 1/1000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왜 거리로 나오는 걸까?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이 타인의 몸과 마음에서 반복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공감하고 그들의 행동에 함께한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공감 능력 지수를 돌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