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눈에는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산행하는 사람이 보인다. 홈쇼핑에서는 운동복이나 운동화가 보인다. 그들이 들고 있는 음료수, 물통이 보인다. 우리 동네에 체육관이 그렇게 많은지도 처음 알았다. 몇 개월째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지식,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한다. 수업 시간에 배운 디자인,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 혹은 실제 공간에 등장하면 눈에 확 들어오고, 설계자에게 설명을 들으며 보는 공간은 그렇지 않은 공간 대비 확실히 잘 읽힌다.
디자인 관련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혹은 인생을 더 살아보니, 아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이(만) 보인다.'라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다. 학생들과 견학 후 주제를 한 가지만 정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면, 보고서는 학생 수만큼 다양하다. 누군가는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살에, 누군가는 화장실의 손잡이에, 누군가는 벽체의 구조나 재료에 꽂힌다. 책 모임을 해 봐도 마찬가지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제각각이다. 다른 이가 공감했다는 어떤 내용은 그런 내용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내가 5년 전에 읽은 책을 펼쳤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의 내가 왜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달라졌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지식이나 앎의 결과가 아니라 내 생각의 방점, 관심, 욕망, 질문의 결과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열거해 보면 된다. 그들이 모이면 here and now의 내가 된다.
뭐가 있을까? 체육관과 운동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나는 요즘 우선 가는 곳마다 길고양이가 보인다. 길고양이를 살뜰히 챙기는 지인 덕분에 나도 캠퍼스에 사는 고양이의 먹거리를 걱정하게 됐다. 전에는 한 번도 인식해 본 적 없던 아이들이다. 뚠딴이, 금동이, 콩이, 비단이, 호동이, 여름이, 가을이 등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아이들이 늘었다. 결국 두 마리의 고양이, 달리와 나리를 입양했다.
선인장도 살아남지 못하던 내 집에서 벌써 5년째 잘 살아준 포인세치아. 그 아이들은 키운 후 주변에 버려진 화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사람에게는 살리는 손, 죽이는 손이 따로 있다고 믿는데, 내 손은 확실히 '죽이는 쪽'이다. 20, 30대에는 아예 식물이라는 존재에 관심이 없었고, 40대부터는 여러 계기로 도전과 노력을 반복했지만 100% 실패했다. 화초에 관심을 두자 집안에 크고 작은 화분이 다섯 개까지 늘었고, 나 같은 사람에게도 화초를 살려달라며 부탁하는 사람이 생겼다.
글쓰기를 하면서 운동을 체화한 사람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사람이 보인다. 그의 소설이 아니라 달리기가 보인다. 한강, 김영하의 글이나 책이 아니라 그들이 집필 노동을 견디는 힘이 궁금하다. 소설가 스티븐 킹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 속에서도 다음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성공의 비결을 묻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두 가지가 있다고 대답하곤 한다. 육체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 (중략) 나는 건강한 신체를 가졌고 또한 나에게는 누구에게든 엄살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자신만만한 여자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지금껏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188쪽)” 소설가이며 번역가인 안정효는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했다. 글쓰기가 육체적인 작업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두 권의 책을 내면서 내가 글을 쓰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고, 책을 통해 타인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글을 쓰는 내 곁에 고양이와 화초가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려면 무조건 전제돼야 하는 것이 건강한 몸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