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춥고 어두운 날이었다.
아이들의 저녁은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두 아이는 뒷좌석에 타자마자 앞다투어 학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들은 차 안에 밥통과 반찬통을 능숙하게 고정시켰고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된 음악을 틀었다. 엄마 때 음악을 사랑해주고, 함께 그 시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이들이 뿜어낸 습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히터를 작동시키기 바빴다. 한티역에 도착하여 신호대기를 위해 차를 세웠을 때, 옆 차량에서 요란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지만 뭔가 위급함이 느껴지는 신호를 보냈다. 살짝 겁이 나기도 했지만, 문을 단단히 잠그고 유리창을 살며시 내렸다. 옆 차선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도로의 무법자를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는 분명 아니었지만 그 내용은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 라이트가 꺼졌어요! 그렇게 가시면 위험해요!"
대화의 내용은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같은 처지의 학부모를 걱정해서 보내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신호가 바뀌곤 차종도 차량번호도 전혀 기억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두고두고 감사함으로 남아있다.
그와 동시에 머리를 한 대 크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앞만 보고 달렸다.
차 안에 아이들을 태웠고, 손수 만든 끼니를 먹였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줬고 충분히 소통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차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몰두하느라, 주차장에서 앞차를 배려한다고 라이트를 껐던 사실을 잊었다. 어찌 보면 운전을 하고 아이들을 태워 이동하면서 안전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은 채 나아가기만 했던 것이다.
학원가에서 만나는 선생님들, 실장님들, 특히 친구 엄마들과 함께 하다 보면 어느새 불문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세계에 젖어든다. 마치 중요한 비법을 알게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그 방식을 알면서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노릇이라고 믿게 된다. 어느 학원의 수업, 어떤 원장님 수업을 들으면 지금 부족한 내 아이의 2%가 채워질 것이라는 엄마의 믿음은 확신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믿음과 확신들은 어쩌면 앞을 보고 달릴 힘이 되었을지 모른다. 동시에 주변을 돌아보고 내 아이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요인들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이제 아이들을 태우고 정신없이 달리는 이 좁은 공간에서 나와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할 때라는 사실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운전대를 잡고 작은 거울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겨 먼저 급히 걷고 따라오는 아이들의 안전 여부를 흘끗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앞서 걷도록 하고 뒤에서 그저 바라보기로 했다. 뒷모습을 바라보니 두 어깨를 누르고 있는 무거운 가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걷는 것 초차 기특했던 그 아이들은 이제 혼자 길을 건너고 학원 문 앞에서 하염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를 한번 돌아봐준다.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걷는 모양이 왜 저리 비뚤어졌지? 척추 측만이 온건 아닐까?’ ‘허리는 왜 저리 구부정하게 걷지?’라는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저 안전하게 길을 건너는 모습을 바라보기로 했다.
이곳 대치동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결코 아이들을 앞서 나가며 이끄는 부모가 되지 않을 것을 다짐했었다. 아이 삶의 주도권을 아이에게 주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했다. 이 과정을 아이의 연령에 맞게 허용과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작은 선택부터 아이들에게 기회를 넘겨야 했다. 음료 메뉴를 정할 때도 먹을 빵을 고를 때도 의지대로 결정하고 자기 손으로 집어 계산까지 마치는 것에서 시작해야 했다. 학원을 옮기거나 과목을 줄이고 추가하는 것도 결코 엄마가 먼저 나서서 결정하지 않아야 했다. 환경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꺼내면 그 학원을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게 했고 그 이유에 설득력이 있다면 그때야 비로소 엄마의 역할이 주어졌다. 갈 수 있는 학원을 알아보고 입학 테스트를 잡고 그 결과를 아이에게 알려주고 배정된 반의 스케줄을 공유한다. 학원을 이동한 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후회와 불만족에 대해서는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했다. "전에 다니던 학원이 나았다. 힘들다." 는 불평은 아이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이므로 아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엄마는 그저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이가 먼저 무언가를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제시하고 아이가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과정은 시간에 쫓기는 입시 상황에서 어쩌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학원을 선택하는 것은 아이의 삶에서 아주 작은 결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작은 결정을 부모가 나서서 해주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 아이가 만나게 될 무수히 많은 선택의 상황에 있어서 그 결정을 부모가 대신해줄 순 없을 것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부모가 이끌고 자녀가 따라오도록 하는 방식은 어쩌면 아이를 차에 태우고 미래에 펼쳐질 일들을 보지 못하고 앞으로만 나아갔던 지난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방향성을 함께 논의할 수 있지만, 마지막 선택은 꼭 아이가 해야만 그 실천과 책임도 아이의 몫이 될 것이다. 성인이 되어 더욱 무거운 의무와 책임이 주어지는 결정들을 후회 없는 자세로 마주할 수 있도록, 음료나 식사 주문, 학원 선택 등과 같은 소소한 결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도록 하고자 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의 종류, 함께 놀 친구들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답을 얻어야 불안이 해소되는 어른으로 성장시킬 순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