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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도쿠 Oct 06. 2019

누구에게나 청춘은 있었다

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미용실에 가서 펌을 한다. 완전 생머리로 태어나서 조금 밋밋해 보이기 때문에 그나마 펌을 통해 웨이브를 줘서 덜 밋밋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생머리라도 요리조리 잘 만져서 멋있게 꾸미는 남자들이 많지만, 아쉽게도 난 그런 능력이 없는 편이다.


언젠가 있었던 일이다. 그 날도 평소처럼 미용실을 방문했다. 해당 미용실은 자주 가던 단골집이라 원장님과도 매우 잘 아는 사이이다. 마침 원장님이 어느 할머니의 머리를 봐주고 계셔서 나는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눈 앞에 여러 잡지가 테이블 위로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몇 개를 집어보고는 재미가 없어서 다시 덮었다. 그런 잡지에는 보통 명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평소 관심도 없을 뿐더러 내 돈으로 살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여 애초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관심둘 곳을 잃은 나는 원장님과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주제는 결혼이었다. 할머니의 손녀가 최근에 좋은 짝을 만나 멋있게 결혼을 한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말솜씨가 연세이 비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짜임새 있게 말씀을 잘하시는 것을 보니 젊었을 적 한가닥하신 분 아닐까 싶었다. 원장님은 오래된 경력만큼이나 역시 능숙한 리액션을 덧붙이며 할머니의 이야기를 받아주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재밌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거울을 통해 원장님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원장님이 말했다.


"여기 있는 청년도 아직 결혼 안 했어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시켜주세요."


할머니가 거울을 통해 내 쪽으로 눈을 흘겼다. 그러더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소개시켜주면 중매밖에 안 되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알아서 잘 만나 결혼하잖아."


"에이, 그래도 사람 인연은 모르는 거니까요."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럴 필요 없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혹시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처럼 보일까봐 손을 내젓는 속도는 느릿하면서도 일정하게 유지했다. 물론 연애가 하고 싶지만 뜬금없이 미용실에서 만난 사람에게 소개를 받고 싶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인연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여긴 아니었다. 원장님, 할머니, 그리고 나. 이 조합으로 멋진 인연이 찾아오긴 조금 애매하지 않은가. 그러다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 할머니에게 여쭤보았다.


"할머니 때는 다들 중매를 통해 결혼하셨죠?"


"그런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아니었어. 나는 연애해서 결혼했거든."


오! 나는 감탄사를 내비쳤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볼은 조금 붉어진 듯하기도 했다. 다시 한 번 여쭤보았다.


"그 시절의 연애는 어땠어요?"


"좋았지.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설레."


할머니는 그 대답과 함께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설레던 그 시절을 일순간 머릿속으로 읊고 있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젊었을 적 모습을 상상했다. 머리는 새까맣고 주름은 하나도 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런 소녀가 한 소년의 고백을 받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소년의 고백에 어떤 말로 응답했을까. 황금빛 논밭에서 두 남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근엄하고 엄격한 시대이므로 좋아하는 마음을 표출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드러내기 어려울지언정 좋아하고 설레는 마음 그 자체가 엄격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주변을 맴도는 법이므로 50년 전 그 마음도 지금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은 시대마다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 수는 있어도 결코 낡지 않는다.


할머니의 표정이 설렘에서 슬픔으로 옮겨갔다. 그 표정을 읽었기에 내 질문은 거기서 멈추었다. 나중에 할머니가 떠나고 원장님이 따로 얘기를 해주었다. 할머니는 꽤 오래 전 사별을 했고 혼자 힘으로 멋지게 자녀들을 길러내신 분이라고. 우리가 지금 청춘이듯이 할머니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바쁘고 고된 삶에 지쳐 잊고 지냈지만, 그녀에게도 분명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던 나날이 있었을 것이다. 잠시 잊고 있었다. 누구나 청춘을 거쳐 황혼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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