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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동 Sep 12. 2021

내 기억 속에 그 집

그 집 마당 한가운데엔 커다란 나무 하나가 홀로 덩그러니 있었다. 처음엔 무슨 나무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간혹 떨어진 열매를 봐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데다가, 조금도 탐스럽거나 먹음직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한지라, 열매를 갈라 살짝 혀를 대봤다. 생긴 그대로 정말 아무런 맛도 없었다. 사람이 못 먹는 열매가 달리는 나무라고 여겼다.  

    

비가 한차례 내리고 난 후 마당에 열매가 눈에 띄게 많이 떨어졌다. 주인 할머니는 어느새 그걸 바가지 한가득 주웠다. 주인 할머니는 그 열매의 껍질을 칼로 깎으면서 내게 먹어보라고 했다. 모양은 참 볼품없었는데, 몰캉몰캉한 것이 참 달고 맛있었다. 지난번에 떨어져서 맛본 것은 덜 익은 거였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단정 지었던 그 열매의 이름은 무화과였고, 무화과는 익으면 약간 붉고 몰랑해져서 단맛이 났다. 생전 처음 맛본 무화과 열매 맛은 꽤 괜찮았다. 



    

우리가 세 들어 살았던 한옥집은 무화과나무가 있는 마당을 중심으로 본채에는 주인 할머니가 혼자 살다가, 주인 할머니의 언니와 손주가 들어와 같이 살았다. 주인 할머니의 언니도 우리 할머니처럼 손주의 뒷바라지를 위해 시골에서 올라왔다. 그 당시엔 시골에서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입학하는 경우가 흔했다.


 본채와 마주 보면서 본채 다음으로 가장 큰 아래채엔 현아네 가족이 살았다. 현아네 아빠는 중동에 돈 벌러 갔고, 현아 엄마와 이모, 현아 오빠가 함께 살았다. 아래채는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고, 양쪽으로 부엌과 변소가 딸려 있는 제법 번듯한 살림집이었다. 


본채 한쪽에서 앞으로 뻗어 나온 끄트머리 자그마한 방에 할머니와 우리 남매들이 살았다. 우리 방은 무화과나무와 마주하는 쪽에 문이 하나 있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문이 하나 더 있는데, 두 방문 앞쪽으로는 좁은 툇마루가 깔려있었다. 무화과나무와 마주하는 문 쪽엔 책상과 비키니옷장 같은 살림살이를 둬서 문을 막고, 모퉁이를 돌아 남쪽으로 난 문으로만 드나들도록 했다. 


작은언니까지 오면서 식구가 늘자, 주인 할머니는 무화과나무를 사이에 두고 우리 방과 마주하던 방을 수리하고 도배장판도 새로 해서 우리한테 세를 놓았다. 오빠 방으로 썼던 그 방은 우리 방보다 작았지만 불투명한 작은 유리창이 달린 여닫이문이었고, 우리 방과 달리 잠금장치도 있었다. 우리 방은 잠금장치 하나 없는 창호지 미닫이문이었다. 창호지 문에 장금장치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겠나만.  



    

우리 방 앞쪽엔 감나무 한 그루와 뚜껑이 덮인 샘과 넓은 장독대가 이어졌고, 감나무와 샘 사이엔 낮은 돌계단이 있었다. 그 돌계단은 내게 아주 특별했다. 

어느 날 저녁, 하늘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방에서 나와 아무리 두리번거려봐도 그 소리의 근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그 돌계단을 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얼마 안 되는 높이였지만, 그곳에선 마당에서와 달리 하늘이 온전하게 다 보였다. 그 순간 하늘 저편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생전 처음 보는 거였지만, 난 그 이름을 단번에 알아맞힐 수 있었다. 불꽃 정말 이름 그대로였으니까! 찬란하고 화려한 꽃이 까만 밤하늘 여기저기에서 마구마구 피어났다. 노란 황금빛 꽃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면서 곧장 내 머리 위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그곳은 나의 안식처가 됐다. 그곳은 아래채에 딸린 부엌 지붕이었는데, 거기에 올라가 있으면 감나무와 처마에 가려서 마당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맘에 들어 울적한 날이면 아무도 몰래 그곳에 올라갔다.      


감나무에서부터 장독대 옆으로 둘러쳐진 높은 담벼락까지 연결된 기다란 빨랫줄은 모두가 함께 사용했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남향이라 빨래가 잘 말랐다. 하지만 두꺼운 겨울 빨래는 햇살이 좋은 낮엔 좀 마르는 듯하다가 해가 지면 금세 꾸덕꾸덕해지면서 얼었다. 밤새 돌처럼 딱딱하게 언 빨래는 다음 날 낮이면 또 조금 마르다가 또 얼고, 이걸 몇 차례 반복해야 빨래가 온전히 말랐다. 가끔은 주인 할머니나 현아네 짤순이에 빨래를 짜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럴 때면 빨래가 저절로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방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우리 부엌인데 그 공간은 매우 넓었다. 맨 안쪽 주인집 전용 수돗가를 제외하고도, 허풍을 좀 떨면, 웬만한 운동장 크기였다. 우리 방으로 연결된 보일러 연탄아궁이와 작은 부뚜막과 찬장 그리고 여름용 화덕이 실제 우리 부엌의 전부였지만, 부엌문도 따로 없고 별다른 경계선도 없는 탓에 정확히 어디까지를 우리 부엌이라고 구분 짓기가 어려웠다.


부엌 옆으로 널찍하게 자리 잡은 수돗가엔 엄청나게 깊고 넓은 커다란 빨간 고무 다라이가 박힌 듯이 놓여 있고, 기다란 호수로 연결된 수돗물을 늘 받고 있어서 언제나 물이 가득했다. 그 수돗가는 현아네와 우리가 공용으로 사용했다. 수돗가 옆으로 현아네 세탁기와 넓은 평상이 있었다. 연탄아궁이 옆에 딸린 우리 부뚜막은 좁고 높이도 안 맞아서 할머니는 평상에 앉아서 나물을 다듬고 찬을 준비했다.


너른 수돗가는 빨래할 때 특히 유용했다. 일요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목욕을 다녀와서 아침을 먹자마자 곧장 대대적인 빨래가 시작됐다. 일주일간 모인 빨래는 늘 산더미였다. 빨래는 우리 세 자매가 도맡았다. 넓은 다라이 서너 개에 물을 받아 나란히 놓고, 한쪽에서 세제를 풀어 치댄 빨래를 넘기면, 다라이 차례차례로 몇 번 헹궈대면 그 많던 빨래도 순식간에 끝이 났다.      


부엌이 휑하게 드러나서 초라한 세간살이를 다 내보이는 게 좀 그렇긴 했지만,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서로의 형편을 다 아는 처지라 크게 감출 것도, 부끄러울 일도 없었다. 그러나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엔 벽에 걸어둔 냄비들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탁 트인 그곳에서 매서운 추위와 마주하면서 매끼를 해대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 몫을 온몸으로 감당해낸 할머니와 큰언니 덕분에 우린 추운 겨울도 그곳에서 무사히 잘 보냈다.     




비록 세 들어 살았지만, 고향을 떠나와 처음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라 그런가, 그 집의 모습은 지금도 단번에 다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생생하고, 가끔 꿈에서도 보였다. 문득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집의 정경들을 그려내고 싶었다.




(이미지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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