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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Jan 02. 2016

유년기 8할은 미술학원

유년시절이 있어줘서 난 또 행복을  꿈꾼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깨고 싶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나는 잠을 더 자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꿈을 더 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면상태에서도 뇌가 깨어있어 정신활동이 활발해지는 램수면상태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수면 패턴이다. 이 상태에서 꿈이 빈번하게 만들어 지기에 '잠을 자는 것'과 '꿈을 꾸는 것'은 침대만 공유할 뿐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 된다. 2시간을 자도 꿈을 꾸지 않으면 우리는 잘 잤다고 말할 수 있지만, 6시간을 자도 꿈을 꾼다면 일어나도 피곤한 기분을 지울 수 없으니 말이다.  


꿈에 대한 명확한 불호를 갖고 있음에도 믿지 않는 신을 향해 되지도 않는 간청을 하고 싶었다. 

364일은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에 먼저 깨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고 일어날 터이니, 오늘 하루만은 1시간 더 꿈을 꿀 수 있도록 나에게 25시간을 허해달라고.


이토록 다시 꾸고 싶어 했던 꿈속에서 나는 미술학원에 서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미술학원의 풍경과 선생님은 변함없이 그때 그대로였기 때문에 그곳에 서있는 내가 어린 나였는지 지금의 나였는지는 알 길도 없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몇 분 남짓의 이미지들에 내가 집착했던 건 그 장소가, 하필 그 장소의 시간이, 유년을 가리키고  있어서였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미술학원을 중학교에 입학하던 즈음 그만두게 됐다. 회사원도 몸이 아프거나 사정이 생기면 반차나 연차를 쓰거늘 나란 어린이는 사실상 오지 말라고 하는 학원 방학과 공휴일, 주말만 빼고 5년간 모든 날에 그곳에 갔다. 미술학원은 수업시간엔 말 한마디 하기 힘들 만큼 아주 내성적인 아이가 유일하게 활기차게 웃고 떠들었던 곳이자 10대에 느낄 수 있는 모든 행복이 고스란히 응축돼 있는 곳이었다.


저학년 땐 그리기보다 다양한 색감과 재료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했다. 점토를 빚고 색을 칠해 만들었던 보드 타는 소년 인형, 색모래를 이용해서 그렸던 일출의 바다, 크레파스로 사포에 그렸던 나의 피카소가 이십 대 후반인 지금에서도 눈에 선하다. 얼굴의 양쪽만 다르게 그리면 입체파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가 되는 줄 알았던 열 살은 무식해서 용감했고, 그래서 더 자유롭게 색칠하는 꼬마였다. 그리고 나선 작은 사물부터 관찰하고 그리는 정밀묘사를 하며 스케치하는 법을 익혔고, 본격적으로 수채물감을 사용하면서 자연의  봄여름 가을 겨울을 담아내는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었다.


 


파스텔을 처음 접했을 땐 첫 솜사탕이 입에서 녹을 때처럼 신세계를 만난 거 같았다. 파스텔로 그린 뒤 손으로 살살 문지르면 하늘색 바다에 빠진 하얀 구름이 조금의 이질감없이 부드럽게 보였다. 색과 색이 섞이면 섞일수록 아름답게 보이는 그 매력에 나무 한 그루를 그려도 갈색뿐 아니라 빨강, 노랑 계열의 색까지 10가지나 넘는 색들을 섞어서 칠하기도 했었다. 


호국보훈, 환경보호 , 화재예방 등의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해마다 글쓰기-그리기 대회를 열었던 학교 덕에 난 늘 포스터 그리기에 참여했고, 꽤 많은 상장을 받아 오기도 했었다. "학년이 바뀌었으니 또 포스터를 그려야지" 포스터는 나에게 제야의 종소리처럼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존재였다. 포스터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너도나도 불조심' 같은 표어까지 곁들여야 했기에 대회 시즌에는 50cm 자를 학원에 가지고 다니며 글씨의 간격과 굵기를 맞추는 설계 아닌 설계를 해야 했다. 포스터물감은 물을 거이 쓰지 않아 금방 굳어버리는 특성 탓에 랩으로 싼 아크릴판을 파레트로 사용했고, 한 장씩 랩을 벗겨내는 그 재미가 쏠쏠한 물감이었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자 선생님은 고학년들만 모아 유화 그리기 특강을 열었다.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받고는 사뭇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가 돼서 "이제 나는 스케치북에 그리는 사람이 아니야" 라며 저학년들을 향해 호기로운 기운을 내뿜기도 했었다. 유화를 시작하는 첫 수업에서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틀려도 돼.
유화는 다시 덧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괜찮아.
몇 번이고 마음에 들 때까지 그려도 돼.

수채화물감을 다른 색으로 덧칠하다 보면 여러 색이 한데 섞이고, 지우개 가루처럼 종이가 밀리는 경우도 생겨서 그림을 망칠 위험이 크다. 하지만 아크릴 물감은 바르고 나면 표면이 매끄러운 고무처럼 금방 굳어서 덧칠을 해도 밑 색과 섞일 걱정이 없다. 틀린 개수만큼 낮아지는 수학 점수와는 다르게 틀리면 틀릴수록 더 괜찮은 그림이 될 수 있는 유화가 어린 나는 참 마음에 들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해 준 미술학원 선생님은 내가 처음으로 동경한 어른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었다.


방학엔 열명 남짓의 아이들을 꾸려 자신의 차를 운전해 서울의 미술관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으며, 초등반 이외에 어린이 집도 겸했던 터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선물포장과 실내장식으로 바빠져서 내가 그 일손이 되어 돕는 대신 비싼 피자를 시켜주기도 했었다. 지금 떠올려 보면 30대 초반의 남자였던 선생님은 풋풋했지만 노련했고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선생님 곁에 있을 때 나는 어린아이였다기보다 그리는 걸 좋아하는 그의 친구가 된 듯했다. 마치 그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세상을 먼저 경험한 선배 같았다.





나는 잊고 있었다. 

나를 신나게 했던 다양한 채색 도구가 있고, 내가 처음으로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느꼈던 그곳.

어스름한 저녁 미술학원에서 완성한 그림을 들고 집으로 향하며 느꼈던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을. 혼이 나고 속상했던 일들도 붓한번으로 멋지게 그날 하루 마무리를 도와줬던 그곳을 말이다.


문득 20년 넘게 아동교육을 연구하신 <마주이야기>의 박문희 선생님이 하셨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어른이 된 나는 어릴 적 즐겁게 놀던 그 기억으로 버티고 살아가는 거라고. 자살하고 싶은 순간에도 유년시절을 떠올리면 애착이 생기고 또 살아가게 되는 거라는 이야기.


아마 인생 최고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요즘의 나라서 그런 꿈이 찾아왔던 건 아닐까.

행복했던 찰나의 꿈이 말하고 있었다. 넌 불행할 수 없다고.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 하나는 옹골지게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그러니 또 넘어갈 수 있다고. 


그래서인지 꿈에서 깬 그날은 숨쉬기 힘든 오전 8시 지하철의 출근전쟁 속에서도, 업무 중 거듭되는 실수에 잔뜩 움츠려 든 나의 등도 이상하리만치 괜찮게 느껴졌다. 여느 날과 똑같이 잘 되는 거 하나 없는 하루의 끝에서 나는 왠지 모를 용기가 생겼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이 있어줘서, 그때의 행복했던 온기를 내 몸이 기억하고 있어줘서 나는 그 온기를 불씨 삼아 더 키워볼 자신이 생긴 것이다.


정말 불행한 어른은 없다. 기억력이 나쁜 어른만 있을 뿐이지.

어릴 적 산타의 선물하나 받아보지 못한 어른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평생을 살아갈 용기란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우린 그저 모래사장에서 동전을 줍듯 작은 행복의 일부를 찾아 기억하면서 위로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이지 않을까. 나에게 미술학원이 그랬듯 유년시절의 그 장소와 그 시간을 다들 한 번쯤은 찾아봤으면 좋겠다. 그럼 적어도 내일 하루는 행복 지푸라기라도 손에 쥐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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