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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Jan 14. 2016

병원에서 알게 된 것들

엄마곁에서 알게 된 병원의 다른 얼굴. 

이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에 한 번쯤 발을 디뎌본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느꼈을 감상이다.


실제론 아프지만 이 병원에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병실 자리가 없어서 밀려있는 수술일정으로 병원에 들어오길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우리 가족도 그 대열에 있었다.


엄마의 암은 지방의 국립의료원에서 받았던 몇 가지 검사 결과가 의심스러웠던 까닭에 드러났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 찾은 서울의 병원에서 위암으로 확정됐다. 의사는 위를 전부 절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갖은 검사와 스케줄 조정이 여러 번 이뤄진 끝에 몇 개월 뒤로 수술 날짜가 잡혔고, 다행히 엄마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직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던 엄마는 곧 일반병동으로 갈 수 있었고, 이후 한 차례 더 병실을 이동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나 또한 본격적으로 엄마의 옆에서 입원생활을 시작했다.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내가 몰 그렇게 잘못했느냐'며 하늘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울분이라도 토해내지 않으면 내 안에 가득 찬 슬픔에 내가 짓눌려서 제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기에.

수술 날만을 기다리면서는 초조하고 불안해서 머릿속의 나사가 풀린 듯이 다녔다. 지폐를 잘못 세서 물건을 살 때 몇 천 원을 더 주기도 했고, 내려야 할 역을 몇 정거장이나 지나쳐 집으로 가는 시간이 한참 걸리기도 했다. 

막상 수술을 잘 끝내고 엄마를 간호하면서부터 나는 무기력해졌다. 우리나라 대기업 병원이라 더 그랬겠지만 온 세상 아픈 사람들은 다 여기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속에 있자니 건강한 내 기운도 쏙 빠져나갔다.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 그래서 병원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는 나의 근황을 나는 내 주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평소 친구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밥 먹듯 하는 나였지만 정작 내가 진짜 힘든 일에 대해선 늘 함구했다. 누구나 힘들어하는 문제가 아닌 나만 힘들어하는 일의 경우엔 특히 더 말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힘 내' 나를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네겠지만, 나를 통해 위안을 얻기도 할 것이다.

가족이 큰 수술을  받는다는 것.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보고 힘을 낸다는 것을 나는 많이 봐와서 알고 있다. 나조차도 그랬으니까.


엄마의 친구분들과 지인, 명절에도 보기 힘들었던 친척들에 처음 보는 사람들까지. 

엄마는 사람들에게 참 잘하고 살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엄마 금방 좋아지실 거야"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모두 한 입으로 얘기하듯 똑같은 말을 했다. "저는 하는 것도 없어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정해진 답을 반복했다. 멀리서 찾아온 고마운 분들의 병문안임을 잘 알고 있지만 병문안이 계속될수록 어쩐지 내 속은 불편해져 갔다.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했다. 진짜 내 말이 하고 싶었다. 해야 하는 말 말고.  



그래서 병원에 온 뒤 처음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주고받다가 대뜸 "난 참 병원이 싫다"고 말해버렸다. 앞뒤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말임에도 친구는 이상한 기색 없이 그 말을 받았다. "왜? 병원이 왜 싫어?" 내 사정을 알길 없는 친구의 물음에 철없음을 느꼈고 정이 떨어질 뻔도 했다. 하지만 뒤이어하는 말을 듣고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난 병원 좋은데.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해주는 곳이잔아.


그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병원이 좋은 곳이란 걸.

병원은 아픈 사람들이 가는 곳이기도 하면서 아프지 않도록 하는 곳이기도 했다.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병원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나는 병원에서 느껴야 하는 감정에 강박을 갖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슬퍼야 한다는 의무감. 

각기 다른 병명을 안고 생사의 현장이 날마다 펼쳐지는 이곳에서 웃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오고부터 나는 모든 빛을 흡수해버린 어둠이 되기로 자처한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기쁨이나 즐거움 따위의 밝고 긍정적인 것들은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헌데 친구의 그 말 한마디에 멈췄던 심장이 움직이면서 온몸에 혈액이 도는 것 같았다. 갑자기 조바심이 나면서 얼마 동안 계속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면 이렇게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엄마의 건강 앞에선 약자고, 그런 나를 돕는 게 병원이라면 내가 좋아해도 모자랐다. 애증의 병원에 대한 경계태세를 점점 풀어나가자 병원의 다른 얼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이. 


병원엔 아픈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곁을 지키는 보호자도 존재한다. 달리 생각하면 아픈 사람의 수만큼 강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누군가가 더 아파할수록, 누군가의 보호자는 더 강해지니까.

병원은 집이기도 했다. 먹고 자고 울고 웃는 일상은 집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드라마틱하다. 각자 머물다 가는 기간은 다르지만 지내는 동안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가는 곳. 혼자라고 느끼지 않도록 누군가가 늘 있는 집.


그리고 나의 일상도 다르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 봤고,  태어나서 처음 '엄마의 머리'를 감겨드려 봤으며

살면서 '엄마의 손'을 가장 많이 잡아본 날들이었고,  처음 '엄마의 잠든 모습'을 그토록 오래 관찰했으며

하루 동안 엄마를 가장 많이 불러보기도 했다.


병원은 나에게 처음이란 타이틀을 가장 많이 붙여준 곳이 됐다. 병원이지 않았다면 알지도 겪지도 못했을 것들이다. 나는 이제 병원을 싫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 뿐이다. 만약 살면서 또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어떤 곳을 가게 된다면 그때는 당당하게 웃으면서 그곳을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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