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 possible Jan 16. 2016

샤브샤브를 보낸다

너에게 도착하지 않을 편지

샤브샤브가 이렇게나 환기가 잘 되는 음식이었더라면 너랑은 먹지 말걸. 

오늘 친구와 먹으면서 생각했어. '환기'라는 단어에 두 가지 뜻이 있는 거 알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탁한 공기를 맑은 공기로 바꾸는 것.

나는 상쾌하게 너를 떠올렸으니 알차게 환기한 거 같아.


너와 내가 만난 시간은 첫 만남에는 적당한 시간이 아니었어. 

저녁을 먹기엔 이른 거 같고 차를 마시려니 곧 배가 고파질 저녁 5시.


날이 추워 너는 따뜻한 국물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래서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있는 대로 굴려봤어. 김치찌개나 부대찌개는 안된다고. 한 냄비에 수저를 섞을 사이는 아니니까. 

그러다 일본문화의 이해란 교양수업을 들어두길 잘했다 싶었어. 

냄비 요리(나베모노) 종류 중에 딱인 게 떠올랐거든. 여러 사람이 같이 먹을 수 있지만 개별접시로 건져 먹기 때문에 일행에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한 점의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샤브샤브.

 

너는 선배의 친구니까 한국의 정보다는 일본의 정을 나누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어. 옷에 냄새도 배지 않고, 여운이 오래 남는 자극적인 맛도 아니면서 한 입 크기의 재료는 입에 쏙 넣기 편하니까 서로 예의 차리기도 좋잖아.


갖가지 채소를 넣고 어느 정도 육수가 우려 질 때쯤 팽이버섯을 보고 너는 대뜸 싫다고 했어. 

쓸데없이 길어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한다고. 국물 속에서 금방 숨이 죽어버리는 팽이버섯과 달리 자신은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튼튼하게 자리를 지킨다고. 한참이 지나고 너는 첫 번째 작업 멘트였다고 고백했지. 버섯을 빌어 이성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두고두고 핀잔을 줬지만 나는 그때 속으로 웃었어. 쓸데없이 감상적인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하면서 말이야.





육수가 끓기 시작해서 친구와 고기를 건져먹었어. 

고기는 너무 금방 익어버리더라. 너랑은 빨리 익어서 좋아했는데. 

선명하게 빨간 고기가 순식간에 빛을 잃어버리는 게 서글펐어. 조금만 더 천천히 익지. 

이건 불꽃놀이보다도 더 짧잖아. 아무리 찰나에 사라지는 게 불꽃놀이의 매력이라고 해도 말이야.

불꽃은 저 하늘에 있어서 손에 닿지라도 않지. 이 고기들은 내 젓가락에 너무 쉽게 잡힌다.

질겨서 맛없어지기 전에 먹으라고 친절하게 어디 도망도 안가.


고기를 건지면서 너도 건졌어. 아니 정확하게는 짧지만 화려하게 빛났던 불꽃을 건졌어. 

이건 내 마음속의 너라서 추억이란 이름으로 잡히나 봐.

이제 너와의 시간은 익을 대로 익은 고기야. 다 익은 고기라서 입에 넣는 도리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지. 


어디 카페 갈래. 맛있게 잘 먹고 나서 친구는 물었어. 

평소 같으면 신이 나서 답했겠지만 자판기 커피는 쳐다도 안보는 친구가 어쩐지 못되게 보이는 거 있지.

너와 내가 샤브샤브 집을 즐겨 찾던 이유에는 종이컵 커피도 있었잖아. 두 잔씩을 비울 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얘기했었지. 카페 가는 값을 아껴서 나중에 비싸고 멋진 곳에 가자고. 커피보다는 얼굴을 마주 보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니까. 하지만 오늘 나는 커피가 더 필요했나 봐.



이문재 아저씨가 <농담>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어.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샤브샤브를 먹으면서 네가 생각났으니까 적어도 나는 진짜 외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 내 옆에 누가 없는 게 외롭지 않다는 게 아니라, 나 혼자라도 외롭지가 않아.

혼자인 게 외롭지 않아. 나쁘지 않아.


네가 떠나갈 때는 1초마다 비어있는 왼쪽 자리가 나를 잡고 말을 걸었거든. 너를 다시 앉혀 달라고. 

한동안은 계속 말을 거는 통에 아무랑도 말을 못했어.

근데 이제는 내가 굳이 꺼내보지 않는 이상 너랑 함께한 기억들이 나를 잡진 않아.


지나간 것은 좋던 나쁘던 다 추억이 된다잔아.

끔찍하게 아팠던 순간이 몇 밤 잤다고 괜찮아지고, 또 더 자면 좋아진다는 거 나는 말도 안 된다고 했었거든. 

그냥 그렇게 잘 살아가다가 '아, 그런 적이 있었지' 하는 거 말야. 참 싫어했는데 알 것도 같은 날이 오네.

 '너랑 건진 좋은 게 많이 담긴 한 냄비가 있었지' 오늘의 시식평이 그렇더라.


그래도 너랑 먹은 샤브샤브가 제일 맛있긴 했어. 어쩌면 다음에도 네가 또 떠오를지도 모르겠어.

니가 보고 싶다는건 아니니까 놀라진 마. 샤브샤브는 너의 이야기만 담겨있는 게 아니잖아. 

그때의 내 이야기도 들어가 있잖아. 그러니까 너와 나의 이야기가 담긴 음식으로 둘 거야.  


너는 잘 먹고 있니...

매거진의 이전글 병원에서 알게 된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