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데가 없다, 너 때문에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보니
해가 막 뒤꽁무니를 빼려고 했어.
집은 금방 어두워질 테고,
그럼 불을 켜야 하는데, 싫더라.
황금 같은 일요일을 이렇게 써버린 내가 불쌍하잖아.
불을 켜면 오늘은 지나갔다는 걸 인정하는 거 같아서,
뭔가 지는 느낌이 드는 거 같아서,
대충 옷만 걸치고 어둠이 깔리려는 방을
얼른 빠져나왔어.
나오긴 나왔는데
딱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찾을 데가 딱 한 군데 밖에는 없더라.
삐-삑. 내 사랑 마이카.
큰길로 나왔을 때쯤 그제야 허기가 밀려왔어.
내가 잘 가는 설렁탕집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보이는 해장국집.
번갈아 자주 가는 두 곳 중에 아무 데나 들어가면 되는데,
갈 수가 없었어.
파스타를 좋아하는 네가 생각났으니까.
"파스타는 친구들 만나면
자주 먹는 거라서 괜찮아.
나 만날 때는 탕 먹자, 너 좋아하는 거."
국에 밥을 말아먹어야 제대로 먹은 거 같다는 나 때문에
좋아하는 파스타는 친구랑 먹으면 충분하다는 너 때문에
우리는 전골요리 맛집을 찾아다녔지.
너도 맛있다고 했으니까,
착한 네가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서
나는 고마워하는 것도 잊어갔을 거야.
계속 직진을 하다 보니 저 멀리 극장이 있는 빌딩이 보였어.
핫도그나 먹으면서 영화 한 편 보면 되겠다 싶어서
시간표를 검색했는데, 낯익은 제목의 영화가 재개봉한다고 나오더라.
하얀 눈밭에 남자와 여자가 누워있던 그 영화의 포스터를 지나치며
네가 했던 말이 떠오르니까, 나는 또 차에서 꼼짝할 수 없었어.
"여자들은 친구들끼리 영화 보러 많이 와도
남자들은 안 그렇잖아. 나아니면 못 볼 거잖아.
그러니까 나랑은 너 보고 싶은 거 봐도 돼."
총이 등장하고 몇 명은 사라지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나 때문에
좋아하는 아름다운 사랑 얘기는 친구랑 보면 된다는 너 때문에
우리는 리암 니슨 형님을 자주 만났지.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는
먼저 찾아서 보러 가자고 했으니까
난 그냥 따라갔을 거야.
집을 나왔는데 나는 갈 데가 없어.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같은 곳만 몇 바퀴 째 돌고 있어.
느끼한 파스타 먹으러 갈 걸.
눈물 나는 로맨스 보러 갈 걸.
너랑은 안 가본 내가 좋아하는 장소
하나는 숨겨두면 좋았을걸.
그럼 오늘 나는 갈 데가 있었을 텐데.
너는 왜 모든 걸 나한테 맞춰줬어?
왜 너는 내가 변할 기회는 주지 않았던 거야?
너만 조약돌처럼 퐁당 들어와서
나는, 내생활은 달라진 게 없었어.
내가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하는 너 때문에
이해도 배려도 내 몫은 아니었으니까.
넌 착한 게 아니라 이기적이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완벽하게 마음씨 고운 너는 나처럼
밖에서 방황하진 않을 거 같네.
네가 좋아하는 곳에선 내 냄새는 나지 않을 테니까.
담뿍 받은 사랑은 자리를 남겨.
그 자리는 처음엔 보이지 않다가
준 사람이 홀가분히 사라지고 나면
그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자국을 드러내.
그 자국을 피해서 나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네가 가자는 곳이 아니면
어디도 가지 않겠다는 사람.
너를 1cm도 변하게 하지 않을 사람.
다음번 네가 만날 사람은 그랬으면 좋겠다.
너에게 수많은 자국을 남겨서
어느 날은 늘 가던 곳으로 향하지 못하는 너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땐 우리 똑같이 갈 수 있을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