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쓰는 이유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을 보다가
지나간 달을 앞으로 오도록 넘겨본다.
친구 생일이었고, 심야 영화를 봤었고, 운동화 사는데 얼마를 썼고...
네모칸마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달이 있는가 하면, 어느 달은 빈 구멍이 듬성듬성 보이고,
아주 깨끗해서 한 장 전체가 큰 구멍처럼 느껴지는 달도 있다.
한 칸 한 칸 눈을 맞춰 보면 그날 누구와 어디를 갔었구나 새록새록 기억이 나는데,
숫자만 덩그러니 적혀있는 칸에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날에도 나는 밥을 먹고, 걸었고, 들었고, 느꼈을 텐데.
그날에도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없어졌다. 달력에서도 내 머리에서도.
어느 단막극에서였다.
몇 년째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지는 고시생에게 갑자기 나타난 한 소녀가 묻는다.
여태까지 뭐하고 살았느냐고. 대학교 다니고 군대 갔다 오고 취업 준비하고,
그냥저냥 살았다는 대답에 소녀는 그렇게 말하면 별로 한 게 없어 보이지 않냐고 대꾸한다.
나에게 누군가 그렇게 물었대도 내 대답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군대가 빠지니
내가 살아온 나날은 더 약소한 문장이 된다.
"그렇게 뭉뚱그려서 얘기하면 아저씨 인생이 화내요.
내가 그거밖에 안 되느냐고.
디테일하게 기억해야 사는 게 덜 억울하더라고요."
굳이 뭉뚱그리려고 한건 아닌데, 말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실체가 있어야 하고,
시작하고 부서진 것들 말고, 처음과 끝이 동시에 담긴 결과물을 얘기하려 하니 아저씨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는 없었을 텐데. 애석하게 그의 말에 마음이 동하였다가, 반토막 난 채로 포장된
인생 덩어리가 떠올라 '뭉뚱그리다'는 표현에 싸늘함을 느꼈다.
이름, 나이, 13자리 주민등록번호, 11자리 휴대폰 번호
망설임 없이 말하고 적는 나에 대한 것들.
이것들 뿐이라면 나는 참 억울할 거 같다.
하지만 남들에게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나에 대한 것들은 억울해도 저것들 뿐일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생각해야 말할 수 있는 건 나부터 신뢰하기 어렵단 거니까.
역사를 기록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남기기 위해서였다. 잘 보관해서 과거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남겨진 이들이 살아가는 동안 현재에서, 미래에서 언제든 비춰볼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을 쓰는 이유도 내 역사를 남기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서,
노력만큼 결과가 알아주지 않는 일도 많아서,
잊지 않으려 애써도 시간의 흐름은 모든 걸 무디게 만들어서.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기억하는 만큼만 살았다 가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나의 살아냄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건 중요하다.
스티브 잡스처럼 우주에 흔적을 남기진 못하더라도, 내 삶의 흔적은 종이에 남겨야겠다는 생각.
아무것도 한 게 없진 않으니까, 우리는 살았으니까, 오늘도 열심히.
그래서 써야겠다, 오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