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술에 취하다

24년 1월 셋째 주

by 안녕 테비

남편은 약속이 많다. 일로도 그렇지만 친구들과도 매우 자주 만난다. 툭하면 저녁 먹고 온다고 알리며 저녁뿐만이 아니라 술까지, 당연한 얘기겠지만. 남편의 술 빈도수를 감안해 집에 맥주를 사두지 않는다. 밖에서 마시고, 집에서도 마시면 도대체 얼마나 마시나 싶은 거지. 반주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동네 마트에 가면 맥주를 한 캔씩 팔기는 하지만 가격표를 보면 또 한 팩이 싸니까 팩에 눈이 가기도 한다. 그래서 아예 술을 사지 않는다. 마시고 싶어도 참는다. 그 덕에 금주 생활 몇 년 차였다.


그랬던 내가 변했다. 책방 덕에 변했다. 동네에 있는 4년 차 된 책방이 터를 옮겨 다른 곳에서 문을 여는데 와인을 팔기 시작했다. 차를 두고 가는 날이면 잔와인을 가끔 마셨다. 이 책방은 와인뿐만이 아니라, 무알콜 맥주도 판다. 무알콜 맥주라고 하면 맛없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여기 맥주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핀란드 ‘꾸꼬’ 맥주를 종류별로 돌아가면서 들이기 때문에 질리지 않고, 맛볼 수 있다. 맛은 일반 맥주나 차이가 없어 시원하게 목 넘김과 함께 ‘캬’ 하는 멋을 부린다. 무알콜 맥주로 이 술만 한 것이 없다. 추천한다.

책방에서 마시는 와인
꾸꼬 무알콜 맥주는 무조건 추천 입니다. 꼭 드셔보세요, 그 중 흑맥주

나는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삶의 방향을 성공에만 두고 같은 방법으로 살길 가르치는 책 같아서. 그러나 나는 책을 읽고 책에 빠져 몽상가처럼 혹은 소설의 팬으로서, 자기계발서를 따라 하는 사람처럼 산다. 따지고 보면 책 후유증일지 모른다. 자기계발서든 아니든,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따라 하고 싶은 후유증에 시달리는 행동으로. <주종은 가리지 않습니다만>을 읽고 탁주에 스며들고 있다. 지난가을 김혜나 작가에게 받은 ‘낙원읍성’을 시작으로 와인처럼 모두 제각각의 맛을 가지고 있는 전통주 매력에 감탄하는 중이다. 지난주 서울에서 가진 책모임 후 받아온 ‘귤술’을 집에서 마셔봤다. 에탄올 17% 정도 된다고 조심히 마시라는 말에 도자기 소주잔 한 잔을 마셨다. 나쁘지 않았다. 오묘했다. 분명 에탄올에 섞인 귤향이 나는데 술집에서 파는 소주에 섞은 과일향 맛이 나는 인공적인 맛이 아니다. 잔향이라고 해야 할까. 은은한 게 자꾸 생각나는 맛이다. 감칠맛이라고 표현하려나. 지난 주말 집에 도착해 한 잔 마시고 쉬었다가 수요일에 마셨다. 운동이 취소되었고, 핑계 삼아 도자기 와인잔에 마셨다. 주말에 마신 양의 두 배쯤 된다. 취할까 봐 조심히 책 읽으며 마셨다. 처음 마실 때 느꼈던 알콜 맛이 없다. 순한 맛이다. 취기도 오르지 않는다.

노릿한 귤술
도자기 잔에 담긴 귤술, 책과 함께 어울리는 술이다.

탁주는 숙성의 시간을 거친다. 마실 때도 숙성하듯 천천히 마셔야 한다. 탁주의 멋이다. 느리게 음미하면서 마시는 멋. 금요일에 마신 막걸리도 그랬다. 림보이양조에서 만든 <THE LAZY DANCING CIRCLE, 레이지댄싱서클> 막걸리를 토요일에 마셨다. 제조일을 보니 1월 17일이었다. 18일에 도착했다. 무알콜 맛을 알게 해 준 책방이 아닌, 인근의 다른 책방에서 입고했다. 크라프트 막걸리라고 했다. 어랏! 이럴 때? 탁주에 스며들고 있는 이때 말이지? 책방으로 발걸음을 했다. 한 병만 사기 아쉬우니 두 병을 샀다. 375ml이다. 보통 와인이 750ml이니 딱 반이다. 용량대비 가격을 생각하면 와인보다 싸지만, 일반 막걸리에 비하면 비싼 술이다. 에탄올 함량은 12%다. 귤술보다 약하다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연말에 탁주 마시고 두통에 시달린 경험이 있으니까. 맛보고 싶으니까, 목요일에 구입하고 금요일에 마셔봤다. 흔들지 않고 윗부분을 따라 마셨고, 다음은 섞어서 마셨다. 신맛이나 단맛이 강하지 않은 슴슴한 맛이라 맛있지만, 맥주처럼 꿀꺽꿀꺽 마시기에 확실히 독하다. 홀짝거린다. 취기가 오른다. 이쯤 마셔야겠다고 잔을 봤다. 1/3을 마셨다. 이 막걸리는 병따개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오래 보관이 어렵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싱크대에 버렸다.

입고된 책방에서 구입한 레이지댄싱서클 막걸리
쌀 색깔이 아닌 집에서 만든 식혜 색깔처럼 회색빛이 살짝 돈다.

버리고 나니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하필 이날 남편은 어김없이 술약속으로 집에 늦게 와 혼자 마셨다. 꼭 필요할 때 없다. 오랜만에 집에서 술 마시는 것을 허락해주려고 했더니 말이다. 거기다 다음 날부터(토요일부터) 인스타에 막걸리 수육 영상이 계속 뜬다. 내가 2/3을 버렸다고 올려서 그런가. 버린 막걸리 더 아쉬워지게 왜 자꾸 영상이 뜨냐 말이다. 얼른 막걸리 보관하는 병을 사야겠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 조만간 막걸리를 집에서 만들 것 같으니까. 만들어 내가 마실 조금만 남겨두고 나눠줄 것 같다. 작가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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