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24
아침에 부랴부랴 샤워를 한 뒤 머리를 말리는데, 화장실 바닥 어두운 타일 위 짧은 흰머리가 보인다. 40대 초중반의, 이제 중년을 맞이한 우리 부부에게 흰머리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특히나 남편은 내가 처음 만났던 20대 시절부터 군데군데 새치가 보였으니 이제 와 새삼 흰머리가 났다고 혹은 늘었다고 놀라거나 슬퍼할 일도 없었다.그래도 작년부터인가 부쩍 늘어난 남편의 흰머리. 회사 일이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아서인지 눈에 띄게 늘긴 했다. 이제 머리를 말리다 떨어지는 머리카락에서 흰머리가 발견되는 빈도도 잦아졌다.
나 역시 작년에 처음 “제대로 된” 흰머리가 났더랬다. 우연히 남편이 발견한 건데, 그간 색이 옅거나 중간에 색이 바랜듯한 머리카락은 어쩌다 간혹 있었어도 두피에서부터 난 흰머리를 발견한 건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아니, 묘했다는 건 중화된 표현이다.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사실 체력이나 피부에서 이미 노화를 느끼며 살고 있음에도 흰머리는 체감되는 질이 달랐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기분. 더이상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늙었음”을 공표하는 기분이랄까. 다른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그정도면 흰머리가 늦게 난 편이고 갑자기 많이 늘어난 것도 아니니 괜찮은 거”라 위로 혹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것과 달리 그 기분 나쁨은 제법 오래 갔다. 누군가는 노안보다 흰머리가 더 기분 나쁘다며 공감해줬을 정도이니.
게다가 친구들이 해 준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흰머리는 “이전의” 검은 머리와 달리 일반 염색약으로 색을 입힐 수 없고 반드시 “새치용” 염색약을 써야 한다고 한다. 한 친구는 염색하러 미용실에 가니 “멋내기용으로 할까요, 새치용으로 할까요?” 소리를 듣고 “머,,멋내기요?”라며 놀라 반문했다는데. 청담동 피부과 의사인 그 친구가 다니는 팬시한 미용실에서도 일반 염색약은 “멋내기용”으로 불린다는 얘기에 모두 낄낄 웃었다. 정말 곰곰히 생각해보면 흰머리를 가리거나 덮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닌 염색은 그야말로 멋을 내기 위한 염색약이 맞다. 그저 새삼스럽게 “멋내기용”이라는 말이 재미있을 뿐.
지난 여름이 너무 더워 머리를 늘 질끈 묶고 올려다니느라 한동안 내 머리속을 들여다봐주는 미용실에 출입하지 않았는데, 슬슬 선선한 바람이 불면 가봐야겠다. 흰머리는 뽑으면 그 자리에서 더 많이 난다 하니 “뽑지 말고 아주 짧게 잘라주세요” 해야지. 없애버릴 수도 없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버린 녀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