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평화에 대한 열망이 나를 평양으로 보냈다. 보스턴-서울-심양-평양. 평화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는 한반도 땅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보스턴에서 서울과 심양을 거쳐 나를 평양으로 실어 날랐다. 머나먼 여정이었다. 어쩌면 물리적 거리보다 더 먼 것은 정서적 거리일 것이다. 대한민국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 30대 후반에 미국으로 이주해 살아온 나. 이제 곧 발을 내딛을 전혀 새로운 세계. 안전에 대한 신뢰는 있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콩당콩당 뛰기 시작했다. 몇 분 후면 곧 해외동포들의 평화에 대한 열망을 전할 멀고도 가까운 북한의 수도, 평양에 도착한다.
아주 특별한 이번 여행의 시작 무렵,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되었던 나의 감정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감동과 희망으로 바뀌었다. 이제 꿈결 같은 여행을 마치고 부모님이 계시는 휴전선 이남의 땅으로 돌아간다. 서울에서 평양. 육로로 3시간 가는 거리를 중국을 경유해 비행기를 갈아타고 9시간 걸려 돌아간다. 평화협정이 맺어져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날, 기차로 평양을 부모님을 모시고 남편, 아이와 함께 올 날을 상상해 본다.
중국 심양에서 고려항공 여객기에 탑승했다. 고운 여승무원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손 짐을 올리는데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가방을 올리다가 놓칠 뻔 해 승무원의 몸에 살짝 가방이 닿았다. “죄송합니다” 승무원에게 사과했다. “일 없습니다”라고 승무원이 대답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몇 번 듣다 보니 맥락상 “괜찮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북한식 표현을 비행기에서 하나 배웠다. 아직도 어여쁜 승무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햄버거가 기내식으로 나왔다. 먹방에 대한 촬영병이 도져, 승무원에게 햄버거 사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안 됩니다”라고 단호히 사진 촬영 금지임을 말한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이유가 있겠지” 속으로 생각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 이곳의 규칙을 존중하고 따르면 된다.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분단된 조국의 다른 한편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나의 가슴은 떨렸다. 잘 알려지지 않는 세계에서 이제 7박 8일을 지내게 된다.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되는 묘한 감정이다. 드디어 평양이다. 내가 평양에 왔다.
심양공항에서 출발하는 평양행 고려항공 비행기
내가 처음 만난 평양
입국심사다. 20대 후반의 남성 심사관이었다.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이다.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내 정보를 보고 재미동포 선생님이라고 나를 칭한다. 내가 하는 평화운동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어떤 활동을 하는지 이것저것 묻는다. 호의에 가득한 관심이 역력하다. 이번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 묻는다. 인민들이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지를 묻는다. 솔직히 대답했다. 내 생각은 어떤지 묻는다. 다른 정책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반도 평화에 관해 처음으로 북과 대화한 대통령이고 그의 그런 외교적 노력은 좋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대화가 한반도 평화에 대한 북미관계, 미국 내의 여론, 나의 평화운동으로 이어졌다. 20분 정도 대화한 것 같다. 이미 다른 줄의 입국심사는 다 완료. 친절한 정세 토론을 마치고 입국심사가 끝났다. 세관을 통과하자 두 명의 남성, 안내원과 기사가 나를 반갑게 맞는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평양 도심으로 가는 길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부터 따뜻한 환대와 친절을 체험했다. 이런 따뜻함은 나의 긴장감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이런 따뜻함은 7박 8일 내내 이어졌다. 수줍은 듯이 웃는 우리 북녘 동포의 표정. 나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선뜻 내주는 호의. 온정을 느꼈던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마지막 날, 평양을 떠날 때 가장 가슴에 남는 건 따뜻한 북녘 동포의 정이었다.
아주 특별한 여행
나의 방북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북한에 가고 싶었다. 오랫동안 북한은 금단의 땅이었다. 남한을 생각하면, “북한 방문”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이 걸리지 않을까 여전히 걱정하는 분위기다. 북한을 생각하면, 보통 대중들에게는 통제된 사회, 자유가 없는 사회, 그래서 여행이 불가한 나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그런 북한을 방문하고 싶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
나는 미국 보스턴에 사는 재미동포다.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2003년에 미국에 이주하여 16년째 보스턴에 살고 있다. 15살 난 아들을 둔 엄마다. 중학교에서 이주민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하다. 이런 미국사는 평범한 교포 아줌마인 내가 왜 그 위험한 북한에 갔을까? 궁금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종종 보스턴 커먼에서 보스턴 시민들과 만나 나의 고국인 한국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미국 상하원 의원과 그 보좌관들을 만나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도록 평화협정을 지지해 달라고 촉구한다. 나는 스스로를 시민평화운동가라고 부른다.
작년 평창 올림픽 이후 한반도에 새롭게 움트기 시작한 평화의 싹은 8천만 우리 한국인들의 가슴에 통일에 대한 부푼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작년 4월 27일에 역사적인 남과 북 지도자들의 판문점 회담과 선언이 있었다. 이어 6월 12일에 싱가포르에서 북한과 미국의 지도자들이 만나 싱가포르 공동선언이라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내게 이 평화모드는 일생일대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로 여겨졌다.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이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분단으로 두 동강이 난 조국의 평화와 남북의 화해를 위해 해외동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스턴 커먼에서 시민들에게 평화협정 지지를 호소하는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