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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Apr 25. 2022

3일 차

2022. 04. 26

Q. 전반적으로 당신은 원하던 삶을 살아오셨나요?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여기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내가 그것을 원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그것은 여전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절대로 살 수 없을 거라는 식의 경솔한 선택을 내리지는 않으려 하죠. 나는 한 때 너무도 경솔한 나머지, 삶은 결단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선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의 선택은 늘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의 죗값을 치르는 일이라고 '선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을 경솔하다고 표현하는 것조차 경솔하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나는 한 때 나의 존재 방식을 그런 식으로 '선택'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Q. 당신이 바라던 삶을 살았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자 하는 이유는 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그때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픈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익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한 선택이 달라짐을 인식할 때에, 그 선택이 나를 기쁨에 춤추게 할 때에 비로소 내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했던 어떠한 방식을 선택했건 나의 삶을 단 한순간도 내가 바라지 않은 대로 흘러본 적이 없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


Q.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하다고 여겼던 때는 언제인가요?

그 질문을 들으니 내게 '슬픔'이 찾아온 순간이 떠오르네요. 나는 슬프다는 표현을 꽤 좋은 의미로 쓰곤 합니다. 내가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곧 기쁨을 느끼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해요. 

어릴 적 나의 작은 방, 파란색 책상 너머로는 커다란 놀이터가 내려다 보였죠. 놀이터의 가장자리를 따라 연식이 오래된 은행나무와 소나무들이 줄을 지었고, 나의 할머니는 때때로는 노란 길을 따라 은행알을 주으며 내게 왔습니다. 나의 할머니는 때때로 하얀 눈꽃이 핀 소나무 아래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며 내게로 왔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한참 전부터 창문에 매달려 있었고, 할머니가 보이면 그 길을 걷는 할머니가 보고 싶어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 몸을 낮추기도 했어요. 나는 그 장면을 겨울이 오는 냄새와 함께 기억합니다. 나는 그 장면이 퍽 슬퍼서. 그것이 꼭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만큼이라는 것을 그때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Q. 인생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지금의 나라면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닐 수 있음이 가장 큰 선물이라 대답할 겁니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내가 오감으로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해왔을 거예요. 종종 나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척 굴기도 하지만, 나는 아마도 이것만은 한결같이 감사해왔을 겁니다.  


Q. 당신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엇인가요?

언젠가 숨겨진 얘기들을 더 나누게 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자랑거리입니다. 수년 전 가족 같은 친구와의 연을 끊는 일이 있었어요. 참으로 별 것이 아닌 계기였지만, 우리가 짊어져온 설움은 컸고, 우리는 별 것 아닌 생에 한없이 작아져 있었던 것만 같아요. 그 친구와 이별을 한 이후, 어느 날 나는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비로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그 친구를 다시 만난다면 꼭 그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너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어. 네가 그토록 바래 주었듯, 나는 사랑받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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