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줄곧 철지난 옷장을 살피며 내가 작년에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나, 이런 쓰레기를 어떻게 걸치고 다녔나 한단다.
나는 한국으로 오는 길에 나의 자그마한 부를 정리하며 헐어빠진 까만 비닐봉지를 청산했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에 도착하여 나의 걸러진 부를 살펴볼 때엔 까만 비닐봉지만큼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때부터 입버릇처럼 엄마에게 까만 가방이 없어서 입고 나갈 옷도 없어라며 칭얼댓고,
나는 올해안에 끝마쳐야하는 마지막 일을 완수한 댓가로 친구와 백화점 백바퀴 도는 다이어트를 선택했다.
가방 디자이너들이 다 졸았나보다고 투덜대다가도 곧장 썩 탐낼만한 디자인에 손을 뻗어보곤 했으나, 번번히 내려놓게하는 야속한 가격표.
심지어 우리는 괜히 패션을 공부하기로 했다며, 감당할 수도 없는 가격의 국내 브랜드 가방에게 너는 결국 해외 유명 디자이너를 쏙 빼닮고 말았어라는 허세마저 곱게 부리고 있는 지경이었다. 많은 가방들을 들어보고 가격에 흠칫거리면서도 그나마 눈에 밟히는 녀석이 있었는데, 아주 심플한 디자인에 고운 가죽을 입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몸값을 오십만원이라 소개했고, 맘에 들면 사주겠다는 엄마의 말에 녀석의 가치를 다시 한번 따져보기로했다.
감당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댓가를 치뤄야하고, 그것을 감수할만큼 탐탁잖은가의 질문에서 나는 멈칫하는 시간의 의미를 깨닫고야 말았다. 단지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지기에는 너무 비싼, 그렇다고 선뜻 결정을 하기엔 빼어나게 맘에 들지는 않은 것 같은 녀석.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녀석의 매끈한 촉감과 탐스러운 입체감이 아른거리지만 나는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다이어트를 마쳤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허탈한 맘에 걸어버린 전화로 나의 친구는 칙칙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동조를 표했고, 지루했던 나는 그 이유를 캐물으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유독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된 신경거리가 거슬렸는데, 그것은 바로 관심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 관심의 정도야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지만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다시 가방 쇼핑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건 왜일까?
애인은 검정색 가방만큼이나, 모든 이들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고, 광범위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이던가.
그러는 우리는 십년 후엔 등대라도 세울 기세로, 벌써부터 쌍심지를 켜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게 해줄 자리를 채우는 일이 꽤 간절하다.
하지만 백화점을 백바퀴 돌듯, 주변 인맥을 탈탈 털어봐도 합리적인 디자인에, 착한 가격까지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조금 과분한 것 같거나, 나랑은 참 많이 달라서 이 사람이 나의 까만 가방이 된다면 오십만원보다 더한 것들을 감당해내야 할 것만 같아.
단지 필요에 의하여 가지기에는 뭔가 걸리는게 많고, 감수할만큼 마음에 쏙 들지는 않은 것 같은 녀석.
항상 신경세포를 건드려 머릿속 한 구석을 벽지처럼 메워버리지만 문자 한통, 전화 한번 먼저 걸기가 쉽지는 않아.
그렇게 계절이 가듯 마음을 거두어버리는 사람.
그것이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연애상대 찾기의 본질적인 문제점이었던가.
나는 창밖으로 흔들리는 불빛에 기대어 가방이 가져다준 이 말도안되는 인생 철학에 헛웃음을 내짓다가 친숙한 동네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같은 브랜드들이 즐비한 백화점이라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번 더 뒤적거려보자고 생각한 동네의 한 쇼핑몰.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을,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아이의 값어치는, 나의, 그의 매력이 끌어당기는 호감도과 일치했고, 머릿속에서 소등하기 시작한 나름 괜찮고, 감당하기 어려운 녀석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드디어! 가장 필요한 것을 얻게 되어서 기쁘다며 신나했고, 정답게 나는 녀석을 내 어깨에 기댄채 긴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탐탁치 있는 상대 찾기의 어려움이 가져다주는 차선적인 우리들의 연애 패턴은 무엇인가.
두루두루 더 좋을 만한 것들이 있을 법한 곳을 실컷 뒤적거리다 제 풀에 지쳐있을때 생각보다 가까운데서 뿅 하고 나타나는 현실?
분명히 훨씬 값어치가 나가보이지만 감당하기에 어려울 것 같은 녀석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만큼은 충실하게 해줄 것 같은 군더더기 쫙 뺀 쉬운 녀석이었던가.
언제나 내 앞에 서있는 이사람만의 매력과, 그사람이 나와의 관계에서 발산하게될 배려의 미덕을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누군가는 오십만원이 꺼림칙했던 내게 그 이상의 가치를 선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선택에 거침없이 뒷통수를 날려버리기도 한다.
내가 언젠가 백만원, 이백만원하는 가방을 서스럼없이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결정은, 빈티지로도 남을 영원한 사랑일까?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눈에 밟힌채로 걸음을 돌리게 하는 오십만원짜리 가방이었던 것은 아닐까.
2012.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