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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제주일지

by 그믐

팔월 삼십일 저녁 제주도

두 명의 나이든 여자가 해변가를 빠르게 지나간다.

초록이끼들은 어느새 내가 볼 수 있는 수평선까지의 바다에 반이 해당되도록 떠밀려갔다.

건너편 사람들은 하나둘씩 불을 밝히기로 했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잔잔함이 눈이 시립도록 슬펐다.

왜 너는 여기에 여전히 그러고 있는건지.

왜 나는 그런 너를 모르고 살았는지.

무엇에 그리 쫒기어 너조차 모르고 살았는지.

무엇을 더 가지려고 그렇게 너를 한 번 돌아보지 못했는지.

나는 그렇게 고요히 여전한 네가 슬펐다.

그렇게 고요히 여전한 너를 마주하는 내가 슬펐다.

빨간 등대는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불이 그의 빛인지 알길이 없었다.


팔월 삼십일일 새벽 제주도

안녕 우도.

건너편 사람들은 하나둘씩 불을 끄기 시작했다.

우리의 여행 첫 날은 그렇게 반 기억, 반 무의식 속에 안치되었다.

갈매기 다섯마리가 함께 날아간다. 어쩌면 갈매기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는 음악을 틀지 않고 아침 여섯시반 풀벌레, 파도, 바람소리에 온통 정신을 다하고 있었다.

바다는 어제보다 빠른 잔잔함을 흐르고 있었다. 구름도, 해질녘보다는 바삐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두 명의 나이든 여자는 빠르게 걷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코 빠르지않게 바닷가를 걸어가고 있다.

여기 살고싶다.

나는 어제의 해질녘과 마찬가지로 Claude Debussy의 Clair De Lune을 틀었다. 핸드폰 스피커 음량을 반 채 키우지 않아도 너무도 음악 소리가 큰 고요한 아침이다.

사실 바다는 파랗지 않았다. 뭐랄까 바다는. 그냥 바다색이다. 무언가를 머금거나 삼키지않고 물고 있는 것 같은, 그러나 그렇다고 뭔가를 참고있지도 않은 바다색이다.


배경이 영화가 되니 한마디 모든 말도 대사가 되더라. 인간 본능에 충실한 감정과 순간에 최선을 다한 나는 조금 지나치다싶을 정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많은 것을 의식 속에서 잃어버렸다. 조금, 사색에 잠기고도 싶었던 것 같다. 늘 그 자리에 있던 네가 애닳파 그런 네 앞의 내가 창피해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그것이 나를 조금은 방해한다고 여겼으나 그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나는 The Hours의 니콜 키드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라면 마음껏 글 쓸 수 있겠단 생각.

제비의 아침 산보는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러다 나는 조금 화가났다. 나는 광활함? 소규모의 광활함. 소박한 웅장함 앞에 한없이 작아졌다. 그리고 맛은 기억조차나지 않는 붉은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뒤늦게 침대에 누워서 든 생각인데, 나는 지난 날의 악몽 아닌 악몽들을 생각해내고야 말았다. 나는 이것을 기억이 아니라 생각해냈다고 고치었는데 그 이유는 나는 그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무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다 믿던 경솔함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하면 도망쳐버리던 바보들. 나는 당신들에게 그러라고 내 얘기를 하지 않았어. 나는 사실 뭐가 맘에 들지 않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를 이해해보려고도 했던 것 같다.


비행기가 공중에 뜰 수 있으면서도 바람의 저항을 가로지를 수 있는 무거움이 어느정도인지 궁금하다.


새벽 다섯시 쓰라림이 잦아든 속에 나는 이 예쁜 곳이 내 집같다 느끼고 싶어서 옷을 걸고 테이블을 정돈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테라스에 앉아 건너편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되는걸 지켜보고. 해는. 뜨지 않았다. 하늘에 스며들었지.

혹 잠결에라도 알아챌까 두꺼운 커튼을 걷어 얇은 천막을 쳐놓고 아침의 푸르름이 앉은 자는 얼굴을 보며 내게 실망했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그러다 저멀리 보이는 우도가 예뻐 아이처럼 다 잊어버린채 신이 나고. 향 타는 냄새가 보고 싶어 불을 가지러 가야지.


저멀리 조그마한 야자수들이 똥똥똥 키재기를 한다. 저 향이 다 타버리면.

씻어야지.


요새는 고맙다는 말에 대해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냄새를 맡거나 색을 발견하는 것 같아. 잘 모르겠는데 무언가 옅지만 깊게 물든 것 같은 마음이야.


구월 일일 제주도

구월 일일의 제주도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어. 바다색은 하늘색에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그저. 저를 마주하고 있는 녀석을 저답게 비출 뿐이었어. 어쩌면 하늘이 바다를 비추는 걸지도 모르지만.


201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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