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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생각 Apr 21. 2020

나 19

머리맡에 자리끼처럼


 명절이 오면 명절 하루 전날 시댁에서 하룻밤을 잤다. 지글지글 지져 내는 고기전 냄새가 집안 모서리마다 듬뿍 배어있고 얼굴에는 기름기가 번들번들해서 유분이 충분했다. 옷에는 명절 음식 냄새가 다양하게 섞여서 잡채 냄새처럼 고소했다. 자정이 돼서야 탕국을 한소끔 끓여놓고 저녁 인사도 드릴 겸 자리끼를 챙겨 아버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작고 앙증맞은 라디오가 베개 옆에 앉아있었다. 소곤대는 소리는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굳이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머님 말씀은 아버님이 잠이 든 것 같아서 끄려고 하면 어찌 아시고 바로 틀고 다시 주무신다고 했다. 자장가 소리로 들리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던 작은 소음이 시아버님 나이가 된 요즈음 나 역시 달달하게 즐기며 잠이 든다.



다름 아닌 오디오로 읽어주는 책. 읽어주는 이들의 목소리는 어찌나 좋은지 꿀 떨어진다. 예쁜 연예인 김태리 님이 읽어주는 이상의 <날개>,1시간 10분 정도를 지루한지 모르고 눈을 감고 단숨에 듣는다. 무료 듣기는 매력 덩어리이다. 하루라는 시간을 정해 놓으니 시간 내에 억지로 끝까지 듣기도 하고, 듣다가 잠이 들기도 한다.


좋은 세상이다. 돋보기 도수가 점점 높아지는데 그나마 멀쩡한 청력으로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저녁에 걸을 때도 듣는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6시간 59분 꽤 긴 시간이지만 어둠 속에서 듣는 데미안의 '나를 찾아가는 길'은 고개들에 하늘의 별도 한번 봤다가 한숨도 크게 쉬어 가며 듣는다. 어찌 대작가의 숨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있겠냐 마는 여전히 어렵고 힘들어서 어둠이 슬쩍 한기를 느끼게 한다.


두툼한 책은 배 위에 올려놓고 자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오면 질질 시간을 끌다가 정리되지 못한 채로 반납하기 일쑤였다. 이 책 저책 식탁 옆에 올려놓고 곁눈질로 쳐다보며 머릿속은 "읽어야 하는데" 노래를 부르며 부담스러워했다. 집안일이라는 것이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핸드폰을 누가 뺏어가기라도 하듯이 쥐어 잡고 등짝이 요 바닥에 닿는 순간 소 천국이 따로 없다. 깊은 밤 아버님의 머리맡 라디오같이 입이 마를 때 마시던 자리끼처럼, 곁에서 가려운 곳 긁어주듯이 마음에 닿는 오디오 북. 널브러진 책과 노트와 볼펜 대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핸드폰에 무언가를 적고 듣고 하는데 이러한 정경이 쓴웃음을 짓게 한다. 오늘은 서이숙 낭독 나혜석 저 '경희'를 듣는다.



2020년 4월 21일 바람이 많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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