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비장하게!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팬티는 5만 원에서 몇백 원 빠지는 거 사 입어""이건 되게 중요한 거야 죽어서는 쪽팔린 거 대책이 없어 죽어서 팬티는 못 갈아입어""수의 입힐 건데 뭔 걱정이야 인마"" 마지막은 팬티야 아 수의는 다 똑같이 입는 거고 맨 마지막은 팬티야 아~""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막가는 것 같아도 오늘 죽어도 쪽팔리지 않게 매일매일 비싼 팬티 입고 비장하게 산다는 거야~"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에서 기훈이 역(송 새벽 대사)
결혼하고 대중목욕탕에 가서 팬티가 신경 쓰여 쭈뼛한 적이 있다. 참 별것 아닌 것,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쭈뼛한 기억이 시간과 관계없이 가끔씩 내 자존심을 건드린다. 스스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있다면 타인에 의해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도 부지기수다.
내가 만났던 30살 B 군은 외모도 왜소하고 성격도 내성적이라서 사회생활을 힘들어했지만 공무원 시험을 여러 번 도전하고 지방 공무원이 되었다. B 군 기억 속에는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바지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장사하는 분이 사지도 못하면서 물어만 보고 다닌다고 뒤에다 대고 들으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더란다. 뒤로 돌아다볼 수도 없고 앞으로 걸으면서 멍하게 그곳을 빠져나왔던 B 군에게는 지금도 옷 가게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할 만큼 수치감을 느꼈다. 뼛속에 파고들어 7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마음 아파서 얘기한다. 아마도 더 시간이 흐른 후에도 기억이 날 것이다. 돈이 없었던 시절이라며 B 군은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안 사는 것과 못 사는 것은 다르다. 돈 없다 무시하는 인격적인 모욕감이 따라온다.
길거리에는 물건 파는 아저씨들이 많다. 무심코 이런 말들을 한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던 수년 전 과일 팔던 아저씨가 떠올라 나도 열불이 난다. 그 순간 창피하고 속상하지만 순간적으로 딱히 대꾸할 말이 금방 떠오르거나 생각나지 않는다. 당황하면 그렇다. 그리고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서도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꼭 착하게 생긴 사람들이거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한테 더 그런다. 마치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 습관적으로 찔러댄다. 정말 치졸하고 비아냥거리면서 말이다. 말이 씨앗이 되어 아주 크게 자라 자신에게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나 보다.
꼭 이것뿐이겠는가! 그러니 누군가가 지켜줄 수 없는 '나' 라면 어떻게 나를 지켜나가야 할지 힘든 세상살이에 작전을 짜야한다. 속옷도 잘 챙겨 입고, 겉옷도 장군처럼 무장하여 날아오는 칼날들을 막아내는 궁리를 할 수밖에. 누구든 마지막 날까지 자신이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있을 것이다. 팬티든 머리카락이든 마음이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고 애를 쓰는 것이 어쩌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19년 11월 16일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