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되도록 일기를 쓰는 이유

by 바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방학숙제를 개학 하루 전까지 미루고 미루다 쫄보 임계점에 도달해서야 부랴부랴 숙제를 시작했습니다. 몰아서 하기에 가장 힘든 숙제는 뭘까요? 경험이 있다면 너무나 쉽게 맞힐 수 있는 문제죠? 정답은 일기입니다.

시작부터 난관입니다. 그 시절에는 꼭 맑음, 흐림, 비, 눈 중 하나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일기를 시작하도록 모든 일기장이 구성되어 있었거든요. 방학하는 첫날 정도는 임팩트가 있으니 기억에 남지만, 나머지 한 달간의 날씨를 기억해내야 하는 건 크나큰 난관이었습니다. 엄마에게도 물어보지만 모르는 게 없는 엄마도 지난 한 달간의 날씨 추이는 모른다니 어쩔 수 없이 사기를 치기로 합니다. '그래 일단 맑음으로 하자, 선생님도 기억 못 하시겠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는데 왠지 모르게 불안합니다. 선생님이라면 그날의 날씨를 꼭 기억하고 계실 것 같아서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날 내가 뭐했는지는 선생님이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게 그날 뭐했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한 달 전 일이 기억날 리가 없죠. 어쩔 수 없이 또 사기를 칩니다. '여름이니 수박 먹었겠지, 수박이 당연히 맛있지, 보나 마나 개구리 왕눈이랑 독수리 오 형제 보고 경훈이랑 자전거 타고 놀았겠지.' 얼렁뚱땅 하루치 일기를 완성하고 다시 번뇌에 빠집니다. 이제 스물아홉 번의 사기를 더 쳐야 하는데 그게 합당한 지 자신에게 묻습니다. 아무리 달력을 뚫어져라 쳐다본들 그날의 행적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으니 사기 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양심을 속이지 않으면서 숙제를 완료할 수 있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이렇다 할 특별한 일이 없었던 거죠! 그저 그런 하루를 보냈으니 기억에 남지 않은 겁니다! 29일 치 일기를 모두 '그저 그랬다.'와 '별일 없었다.' 두 개로 돌려 막기 해서 일기를 완료하고 제출했습니다.

다음날, 10살 인생에서 가장 크게 혼이 났습니다. 숙제를 하나도 안 한 친구들은 저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더랬습니다.


그 날, 얼굴을 붉히며 정성을 다해(?) 야단을 치신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 덕분인지 저는 마흔이 되도록 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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