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방학숙제를 개학 하루 전까지 미루고 미루다 쫄보 임계점에 도달해서야 부랴부랴 숙제를 시작했습니다. 몰아서 하기에 가장 힘든 숙제는 뭘까요? 경험이 있다면 너무나 쉽게 맞힐 수 있는 문제죠? 정답은 일기입니다.
시작부터 난관입니다. 그 시절에는 꼭 맑음, 흐림, 비, 눈 중 하나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일기를 시작하도록 모든 일기장이 구성되어 있었거든요. 방학하는 첫날 정도는 임팩트가 있으니 기억에 남지만, 나머지 한 달간의 날씨를 기억해내야 하는 건 크나큰 난관이었습니다. 엄마에게도 물어보지만 모르는 게 없는 엄마도 지난 한 달간의 날씨 추이는 모른다니 어쩔 수 없이 사기를 치기로 합니다. '그래 일단 맑음으로 하자, 선생님도 기억 못 하시겠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는데 왠지 모르게 불안합니다. 선생님이라면 그날의 날씨를 꼭 기억하고 계실 것 같아서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날 내가 뭐했는지는 선생님이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게 그날 뭐했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한 달 전 일이 기억날 리가 없죠. 어쩔 수 없이 또 사기를 칩니다. '여름이니 수박 먹었겠지, 수박이 당연히 맛있지, 보나 마나 개구리 왕눈이랑 독수리 오 형제 보고 경훈이랑 자전거 타고 놀았겠지.' 얼렁뚱땅 하루치 일기를 완성하고 다시 번뇌에 빠집니다. 이제 스물아홉 번의 사기를 더 쳐야 하는데 그게 합당한 지 자신에게 묻습니다. 아무리 달력을 뚫어져라 쳐다본들 그날의 행적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으니 사기 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양심을 속이지 않으면서 숙제를 완료할 수 있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이렇다 할 특별한 일이 없었던 거죠! 그저 그런 하루를 보냈으니 기억에 남지 않은 겁니다! 29일 치 일기를 모두 '그저 그랬다.'와 '별일 없었다.' 두 개로 돌려 막기 해서 일기를 완료하고 제출했습니다.
다음날, 10살 인생에서 가장 크게 혼이 났습니다. 숙제를 하나도 안 한 친구들은 저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더랬습니다.
그 날, 얼굴을 붉히며 정성을 다해(?) 야단을 치신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 덕분인지 저는 마흔이 되도록 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