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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Sep 23. 2021

쌀국수와 커피 한 잔

일상의 행복

하노이는 9월 21일 오전 6시를 기점으로 사회적 격리가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유령도시처럼 한적했던 동네는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먼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장 반가웠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동안 못 논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자전거, 스케이트보드,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겼다. 거리에는 오토바이 부대가 다시 등장했고 기대하고 기대했던 미용실, 식당, 카페 등이 문을 열었다. 아직은 테이크 아웃만 가능한 상황이지만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있던 상황에 비하면 이마저도 감지덕지다.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의 두 달 만에 자주 이용하던 쌀국수집으로 달려갔다.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곳이지만 아직은 장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불도 반만 켜고 테이블도 접혀 있었다. 아직은 반쪽짜리 오픈이고 포장만 가능한지라 가게 정리도 덜 된 듯 보였다. 내가 들어가자 가게 주인인지 직원인지 처음 보는 여자분이 커다란 선풍기를 서둘러 내 쪽으로 돌리며 주문을 받았다. 가게 주인이 바뀐 걸까? 주인이 바뀌었더라도 사회적 격리가 최고 단계였던 두 달 사이에 많은 상점들이 버티지 못하고 문들 닫았던 지라 다시 가게 문을 연 것만 해도 대단해 보였다. 


항상 시키던 쌀국수 2인분을 주문하고 계속 서있기 뭐해 한쪽 테이블에 어정쩡하게 앉아 가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에는 먼지로 덮인 선풍기가 한아름 줄지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쪽으로 돌린 선풍기도 분명 그중 하나였으리라. 그 선풍기는 마치 가게 주인의 마음을 대신 하소연하는 듯했다. 뿌연 먼지 같이 미래를 알 수 없는 답답함, 불 꺼진 가게만큼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수입이 없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불안함. 주인은 선풍기를 돌려 그동안 쌓아둔 마음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그 일에 조금이나마 일조했길 바라는 마음으로 쌀국수를 기다렸다. 


쌀국수 같은 뜨거운 국물 음식은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야 제 맛인지라 포장해 가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내 걱정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주인은 정성 들여 국물, 쌀국수, 고기, 소스, 마늘류 등을 각각 포장해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따끈한 국물과 국수가 딱 봐도 푸짐해 보였고 내 손은 어느새 묵직해졌다. 고작 한국 돈으로 2,700 원하는 쌀국수지만 이는 한국에서 파는 가격을 훨씬 능가하는 맛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오랜만에 문을 연 커피숍에도 들렸다. 문이 열려있을 때는 정작 자주 가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문을 연 모습을 보니 내 발걸음은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즐겨먹던 아이스 라테를 주문했다. 대체 얼마 만에 남이 타주는 커피를 먹어 보는지 익히 아는 맛이지만 주문과 동시에 왠지 모를 설렘이 몰려왔다. 한 집 걸려 커피숍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사람들은 커피와 차를 좋아한다. 한낮에도 밖에 있는 조그마한 테이블에 앉아 옹기종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베트남 사람들의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곤 했다. 아직까진 그 모습을 볼 순 없지만 그들의 커피와 차 사랑은 여전한 듯했다. 내가 들어오고 나서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고 주문받는 아르바이트생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아이스커피를 손에 잡는 순간 차가운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야. 아이스커피의 짜릿함은 '잠자고 있던 신경세포들이여 깨어나라'라고 말하고 ‘집안에 갇혀 집밥 해 먹느라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라 고생했어’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콧바람을 쐬며 쌀국수와 커피 한잔 들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집으로 돌아가 포장해온 쌀국수를 열었다. 베트남 특유의 향이 느껴지는 고기 국물, 막 삶은 듯한 따뜻한 국수를 보니 군침이 절로 돌았다. 각자의 그릇에 국수를 담고 육수를 붓고 마늘 토핑까지 올렸다. 가게 분위기와 어울려 먹는 쌀국수는 아니지만 2개월을 기다려 맛본 국수 맛은 충분히 훌륭했다. 이어서 마신 아이스커피까지. 천국이 따로 없었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즐기던 일상을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일까. 왜 항상 우리는 그 일상이 끊긴 후에야 '그게 행복이었음'을 느낄까.


베트남은 추석은 있지만 휴일은 아니다. 아직은 여행을 갈 수도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는 처지기에 출근한 남편 없이 아이들과 홀로 지내야 했던 추석은 더욱 쓸쓸하기만 했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가족들 모임 소식, 친구들이 연휴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간접적으로 추석을 느낄 뿐. 그중에 만난 쌀국수와 커피 한 잔은 무엇보다 큰 추석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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